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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May 28. 2018

영화 <스탠바이, 웬디>

#사적인 영화 21: 이 소녀가 세상을 향해 말을 거는 법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5/30일 개봉 예정) 



<스탠바이, 웬디>는 오랜만에 다코타 패닝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함께 출연한 <런어웨이즈>였다. 여기서 다코타 패닝은 펑크 락보컬 '체리 커리'였다. 찢어진 블랙 진을 입고 다크 한 스모키 메이크업을 한 반항의 아이콘, 세상을 향해 폭주하듯 자신을 노래한 록 스타, 동시에 내면의 불안으로 분열된 자아를 지닌 체리 커리를 다코타 패닝은 동시대 또래처럼 연기했다. 추측컨대, 이 영화를 통해 다코타 패닝은 아역 배우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지 않았을까. 실제와 이상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체리 커리처럼, 다코타 패닝 또한 연기에 대한 갈증과 회의가 있지 않았을까. 


"웬디를 꼭 연기하고 싶었어요. 저와 공통점이 많았거든요. 연기할 때 감정 이입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가령, 버스 정류장에서 잔돈을 내는 장면은 딱 제 모습 그대로예요. 잔돈을 넣고 뺄 때 다음 사람에게 방해될까 봐 엄청 불안하거든요." 다코타 패닝은 이미 '웬디'가 되어 있었다. <스탠바이, 웬디>는 마치 다코타 패닝이 기지개 켜듯 관객들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는 영화 같았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스타트렉 시나리오에 몰두하는 웬디처럼,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웬디(다코타 패닝)는 보호 시설에서 살고 있다. 그녀의 하루는 규칙으로 정해져 있다. 기상하면 샤워를 하고 요일별로 정해진 색깔별로 스웨터를 갈아 입고, 아침 식사를 한다. 시간 맞춰 시나몬롤 판매직 알바를 하고 강아지 피트를 산책시킨다. 하루 일과 중의 가장 중요한 시간은 스타트렉 시청과 공모전 시나리오를 쓰는 일이다. 일 분 이상 사람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몸이 닿으면 질겁하는 그녀이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고요하다. 드넓은 우주와 그 사이를 유영하는 우주선, 자신처럼 감정 표현이 서투른 외계인이 등장하는 427 페이지를 가득 채운 상상력은 자유롭다. 그러나 웬디를 보러 온 언니 오드리와 언쟁이 벌어지면서 발작을 일으킨 웬디는 그날 우체국에 시나리오를 보내지 못한다. 스타트렉 공모전까지 시간 맞춰 우편으로 시나리오를 보낼 수 없게 된 웬디는 인생 최대의 용기를 끌어내어 LA의 파라마운트 픽처스까지 직접 시나리오를 응모하기로 결심하는데...  




웬디는 정상이라는 범위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외부 자극에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틀에 잡힌 일상을 강박적으로 지켜야 하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자신을 지키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그 룰 안에만 있다면 그녀는 안전하다. 그래서 그녀가 시나리오를 응모하기 위해 혼자 LA로 가기로 한 결심은 대단한 용기이다. 시설 밖은 정글이다. 모두가 쉽게 할 수 있는 일도 그녀에게는 엄청난 노력과 의지가 수반된다. 심지어 시외버스를 타려면 티켓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규칙이 생기면, 그녀는 일단 수첩에 기록한다. 그다음 여러 번 읽고 외울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벗어날 때마다 반복해서 되뇐다. "Please Stand by." 일단 멈추고, 심호흡을 하고, 자신을 진정시킨다. 잠깐만 기다려봐. 그리고 생각해봐. 그리고 움직여봐. 그다음 웬디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 안에서 끝까지 애를 쓴다. 버스에서 쫓겨나 길을 잃고 헤매도, 돈과 아이팟을 도둑맞아도,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도, 심지어 시나리오 일부를 분실할 때조차 그녀는 이면지에 또박또박 손으로 쓰며 마감을 포기하지 않는다.  


스타트렉이 구축한 세계관 안에서 완벽하게 살고 있는 웬디는 기이함과 동시에 경외감을 준다. 사회성 제로의 그녀이지만 스타트렉 안에서는 꿈을 가질 수 있다. 그녀의 삶을 구축하는 유일한 희망은 스타트렉 시나리오이다. 시나리오를 써서 상금을 받으면 다시 언니와 함께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갓 태어난 조카 루비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보호 시설에서 나와 진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 웬디는 스타트렉을 통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한다. 스타트렉을 통해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심지어 처음 보는 경찰관과 외계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우습지만, 웬디는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웬디와 마주한 언니 오드리는 애초에 동생을 믿지 못한다. 혹여 자신의 아이와 가족에게 해를 끼칠지 모른다는 막연한 의심을 품는다. 그러나 웬디가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면서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돌아가신 엄마가 원하는 게 무엇이었을까." 웬디는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엄마는 이제 여기 없어." 죽은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 없을뿐더러 무의미하다. 웬디와 오드리만이 살아 있는 가족이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사람은 웬디이다. 그리고 웬디는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쓸 것이다. 돌아가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덧: 


감독 벤 르윈은 <이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으로 주목받은 신인 아닌 신인 감독이다. <주노>와 <레이디 버드> 제작진 참여와 눈에 익은 배우들의 출연은 소소한 재미를 준다. <어바웃 어 보이>와 <미스 리틀 선샤인>에 출연한 토니 콜렛은 이번 영화에서 웬디의 멘토, 스코티 선생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언니 오드리 역의 앨리스 이브의 대표작은 재밌게도 <스타트렉 다크니스>이다. 여기에 시나몬롤 가게에서 일하는 동료 니모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벨보이, 토니 레볼로리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웬디를 제외한 등장인물들은 기능적인 역할에만 멈춰 있다. 웬디와 진정으로 소통하고 화해하는 모습도 예상 가능한 전형성을 보여주어 여운이 반감된다. 오히려 웬디가 홀로 상상하며 스타트렉 인물들을 그려내고 대사를 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그나마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도 그녀 같은 덕후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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