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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n 11. 2018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적인 영화22: 가려진 폭력의 공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21일 개봉 예정)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Jusqu'à la Garde)는 섣불리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공포'를 보여준다. 일상의 언어와 소음만으로도 긴장의 끈을 조여 오는 이 영화는 가족 공동체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을 전시한다. 가정 폭력은 미디어를 통해 재생산되는 일상적인 뉴스거리로 전락되어 왔다. 그러니 아무도 그 공포를 체감할 수도,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피해자, 가해자 모두와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옳고 그름의 도덕적 판단보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으로 지금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멀리서 지켜본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폭력의 공포가 어떻게 일상의 생활마저 얼어붙게 만드는지 차분하게 보여준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안의 징조는 무섭고 불편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법의 판결은 아빠의 손을 들어준다. 줄리앙은 고작 11세, 법적 성인이 아닌 그는 꼼짝없이 '그 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줄리앙은 자신보다 더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영화는 한 여성 판사가 분주히 사무실을 나가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이혼 소송 심리를 요청한 부부, 미리암(레아 드루케)과 앙투안(드니 메노셰) 때문에 판사의 신경은 곤두서 있다. 각자의 주장이 다르고 각자의 요구가 다르다.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은 양육권을 두고 팽팽하게 날이 서 있다. 판사는 최대한 건조하게 그들의 아들 줄리앙(토마 지오리아)이 쓴 편지를 읽는다. 아빠와 떨어져 살고 싶다는 바람은 명백하다. 아빠라는 호칭 대신 그 자라고 칭하며 영영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폭력을 행사했는지, 스토킹을 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불충분하고, 앙투안은 직장 내 성실한 일꾼으로 평판이 좋은 편이다. 앙투안은 끊임없이 아들을 보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내는 툭하면 연락처를 바꾸거나 이사를 간다며, 일부러 자신과 아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고 몰아세운다. 2주 뒤의 판결은 남편의 손을 들어준다. 줄리앙은 의무적으로 아빠와 주말을 보내야만 한다. 



시한폭탄 같은 불안은 쥐 죽은 듯 깔려 있다. 엄마와 줄리앙, 누나 모두가 불안에 휩싸여 있다. 전화벨 소리, 문 여는 소리,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시시각각 옥죄어 온다. 아빠 앙투안은 겉으로 봐선 평범하다. 아들을 향한 제스처와 보통의 스킨십도 얼핏 이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되려 무례할 정도로 아들의 태도가 더 차갑다. 아빠에게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을 만큼 겁을 먹고 움츠려 있다.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는 어떤 설명도 차단한 채 현재의 모습만 포커싱 한다. 고개를 푹 숙이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두 눈동자와 작은 소리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날이 서 있는 줄리앙. 이 두 사람의 대화는 주로 좁은 차 안에서 벌어지는데 아빠의 추궁은 헤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엄마는?" "왜 엄마는 연락을 받지 않는 거니?" "엄마를 만나게 해주렴." "엄마 핸드폰 번호가 뭐지?" 매 장면마다 숨길 수 없는 집착과 두려움의 그림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짙게 드리워진다. 아들은 핑계에 불과하다. 아빠는 계속해서 엄마를 찾는다. 줄리앙은 어떻게든 엄마와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거짓말을 하며 애를 쓴다. 교활할 정도로 치밀한 아빠의 낮은 목소리. "지금까지 나를 속였구나. 엄마는 어딨니, 줄리앙?" 


감독은 인정사정없는 엔딩씬을 마련해 놓고 설마 했던 마음에 큰 충격을 던진다. 특별한 큰 사건 없이 조용하게 흘러가던 영화는 돌연 절정에 이르며 스릴러 서스펜스 장르로 변모한다. 가족이라는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드라마가 잔혹극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다.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앙투안은 한밤중에 사냥 총을 들고 탱크처럼 밀고 들어온다. 이웃집 할머니가 신고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경찰의 지시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꼭 쥔 손, 문을 잠그고 욕조 안으로 들어가 입을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소리를 꾹꾹 막으며 눈물만 흘리는 줄리앙과 엄마. 서럽고 무섭고 억울하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간신히 진압되지만, 앞으로 이들을 누가 어떻게 보호해줄 것인가. 결국 이 영화는 결론에서 다시 시작되는 영화이다. 영화 제목은 모든 것을 암시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 모두는 옆 집 할머니처럼 방관자일 뿐이다. 총으로 숭숭 뚫린 문구멍으로 엿볼 수밖에 없는 입장. 서늘한 현실은 생생한 공포이며 얼얼한 충격이다. 과연 이 영화를 픽션으로만 볼 수 있을까. 이보다 더한 가정 폭력이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지거나 방치될 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자비에 르그랑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이 영화로 '제7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였고, 전 세계 33개 영화제의 공식 초청을 받았다. '올해의 버라이어티 선정 10대 감독'으로 선정되어 라이징 스타 감독다운 눈도장도 찍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여러 무대 경험을 쌓았다. "폭발에는 공포가 없다. 단지 그것을 예상하는 것에 있다." "대본에는 모든 디테일함이 담겨 있다. 나는 그에 따라 디자인을 한다."라고 이야기한 감독은 본인이 만든 프리퀼 단편 <모든 것을 잃기 전에>에서 폭력 남편을 떠나기로 결심한 한 여성의 하루를 앞서 선보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폭력 성향의 아빠와 피해자인 엄마, 두 당사자가 중심이 아닌 어린 줄리앙의 입장을 통해 가족 전체가 지닌 모순과 불안, 공포를 리얼하게 그린 점이 돋보인다. 아쉽게도 새로운 서사와 주제 의식을 지녔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보여주기 식으로 강렬한 체험과 폭력의 심각성을 공감할 수 있게 한 점, 긴장감을 쌓아 올려 한 번에 터트리는 연출의 과감성도 영화적 재미를 끌어올린다. 물론, 사회적 메시지 또한 강렬하여 한 동안 잊기 어려운 인상을 심어 준다.   


 



덧: 


(줄리앙을 연기한 아역 배우, 토마 지오리아는 한국 배우 박희본 님과 닮은 것 같다.) 금발이 무색할 만큼 창백한 연기를 실감 나게 자연스럽게 한 이 배우, 놀라웠다. 욕조에서 피 흘리며 흐느끼던 그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겪지 않아도 될 과정을 부모를 통해 겪어야 하는 걸 볼 때마다 슬프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라는 육체적, 사회적 약자를 자기 마음대로 군림하려 드는 강자를 볼 때마다 화가 난다. 그리고 프랑스는 경찰이 사건이 종료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고 적절한 지시와 함께 끝까지 안심시켜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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