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후유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유 May 16. 2018

세계문학 단편, 헨리 제임스  

#11_양탄자의 무늬처럼 복잡한 인간 본성을 언어로 빚어낸 모더니즘 소설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31, <헨리 제임스> 편에는 총 8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총 112편에 달하는 단편 중에서 1870년대와 1880년대 초기와 중기, 1890년대 실험기, 1900년대 후반 완성기의 대표작을 선정하였다. <네 번의 만남>과 <데이지 밀러>가 초기작이며, 1890년부터 1900년까지 10년 동안을 그의 실험기라 칭하는데 <제자> <실제와 똑같은 것> <중년> <양탄자의 무늬> <나사의 회전>과 같은 뛰어난 단편을 발표했다. 마지막 수록작 <정글의 짐승>은 후기 단편으로써 가장 잘 쓰인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모더니즘 기법이 뚜렷한 단편으로 손꼽힌다. 이 중 <데이지 밀러>와 <나사의 회전>은 중편에 가까운  분량을 차지하며, 각 시기별로 소설의 주제가 변화했음을  엿볼 수 있다. 초기 두 작품은 유럽과 미국이라는 구대륙과 신대륙의 충돌, 갈등, 차이를 그렸다면 실험기 거치면서는 인간 본성에 관한 심리, 철학적 담론 그리고 예술과 문학에 관한 눈으로 볼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물음과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독창적인 문체로 그려냈다. 또한, 죽음과 생계고(苦)라는 가난 앞에 놓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19세기 소설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각 수록작들 모두 모던하며 현대적이다. 특히, 심리적이면서 철학적인 소재는 물론 미스터리 한 심령 소재를 끌어 들어 언어로 구현하며 현대 소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완성도를 지녔다. 이런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적인 즐거움, 심도 깊은 주제의 심오함은 깊은 여운을 주며 저절로 문장에 줄을 긋게 만든다. 이 세상에 쓸 수 없는 소설은 없다는 것, 아무리 비슷한 이야기도 새롭게 쓸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 증명했다. 그 어떤 설명적 논조 없이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아름답게 묘사했다. 





초기작 <네 번의 만남><데이지 밀러>는 당시 미국 여성을 통해 구대륙과 신대륙의 문화적, 계급적 차이를 선명하게 그려낸다. 특히 주인공 데이지 밀러는 지금의 미국 여성상을 상징하는 원형적 인물이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의 동명 여주인공이기도 한 이 여성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자유롭고 격식과 예의에 구속되기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유럽의 여성과는 구별되는 생생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주인공은 이를 열심히 '공부'하는데 열성을 다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단편은 <실제와 똑같은 것>과 <중년> <양탄자의 무늬>이다. 세 작품은 예술과 문학, 그리고 인생에 대한 작가의 고뇌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실제와 똑같은 것>은 초상 화가이며 삽화가인 주인공을 찾은 한 부부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당연히 초상화를 의뢰한 고객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이 멋진 신사 숙녀 커플은 자신들을 삽화 모델로 써달라고 절박하게 부탁한다. 가난하지만 예술적이기까지 한 이 부부의 궁핍한 사정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던 화가는 시험 삼아 모델로 그려보는데, 완벽한 모델이라 자부하는 이들에게 재현의 여백이 없음을 깨닫고 곤란에 빠진다. 부부와 기존 모델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과 차이를 통해 창작의 비밀이라는 수수께끼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완벽한 그 무엇은 오히려 창작의 방해가 될 수 있다. 상상력, 투사, 동일화, 해석의 여지가 없는 작품은 모조에 불과하다. 실제 벌어진 이야기 자체만으로 소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의 숨은 역량이 자기 기량을 펼쳐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꾸며낸 이야기, 즉 소설을 통해 감동한다.   


나는 실제와 똑같은 것보다는 재현(묘사)된 것을 더 좋아했다. 실제와 똑같은 것의 결점은, 무엇인가 하면, 재현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외양이 그럴듯한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면 그런 것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것들이 실제와 똑같으냐 혹은 그렇지 않으냐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거의 언제나 쓸데없는 질문이다.  (229)

모나크 부부를 드로잉 할 때, 나는 그들로부터 벗어나서 내가 재현하고자 하는 캐릭터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그림 속에서 모델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246)

부부는 자신들의 실패를 받아들였지만 자신들의 운명은 받아들일  없었다. 그들은 모조 물이 실물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예술의 기괴하면서도 잔인한 법칙에 놀라면서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들은 굶어 죽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258) 


<중년>과 <양탄자의 무늬>는 흡사 문학이란 무엇인가,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말 하고 있는 것 같다. <중년>은 소설가 덴콤과 그를 존경하는 의사 휴와의 대화를 통해 예술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예술을 흠모하는 휴에게 덴콤은 그를 고용한 백작 부인의 유산을 놓치지 말 것을 충고하며, 삶으로 돌아갈 것을 암시한다. 


그의 예술은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그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는 너무나 많은 삶을 바쳤다. 예술은 그에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다른 모든 것보다 뒤에 왔다. 이런 속도라면 첫 번째 존재는 너무 짧다. 필요한 소재를 수집할 정도의 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열매를 맺기 위하여, 그 소재를 활용하기 위하여 예술가는 두 번째 시대, 즉 삶의 확장이 필요하다. (264)

좌절감을 느낀 소설가는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그것을 알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처럼 작가의 의도를 놓쳐 버리고 엉뚱한 곳에다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고서 덴콤은 다시 한번 정말로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281) 

시련을 당하고, 우리의 자그마한 능력을 발휘하고, 우리의 작은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 진정한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습니다. 우리의 의심은 우리의 열정이고, 우리의 열정은 우리의 직무입니다. 그 나머지는 예술의 광기입니다. (289) 


예술과 문학에 관한 담론의 절정에 이르는 단편이 바로 <양탄자의 무늬>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나'가 쓴 서평을 작가 휴 베레커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평한다. 그것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휴 베레커는 그걸 가리켜 '작은 주제' '자신을 구제하는 가능성' '소설을 쓰게 만드는 바로 그것' '작가의 열정 중의 열정' '예술의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핵심 중의 핵심' '작은 트릭' '총체적 구현' '절묘한 계획'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으로 표현한다. 나는 이를 양탄자의 무늬로 비유하며 친구 코빅과 함께 그 비밀을 캐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코빅은 인도로 건너가 불현듯 그 의미를 깨우치고 작가에게 인정을 받는다. 그로 인하여 그웬돌런과 어렵사리 결혼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게 된다. 그웬돌런 또한 그 비밀의 해답을 알고 있으나 나에게도 심지어 재혼한 남편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채 그녀 역시 죽는다. 과연 그 비밀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이는 독자의 남은 몫으로 돌아간다. 다만, 소설 속의 숨은 비밀은 인생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그것은 각자가 발견한 깨달음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無일 수도 있다. 양탄자의 무늬는 매직아이처럼 누구에게는 보이고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움을 지녔으며 각자의 시각과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자, 당신의 몸속에는 심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 요소입니까, 아니면 감정 요소입니까? 아무도 내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언급하지 못했다고 내가 주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곧 생명의 기관을 말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삶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 혹은 어떤 철학이로군요." (307) 

그것은 원초적 계획 속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이리라고 나는 짐작했다. 페르시아 양탄자의 복잡한 무늬 같은 어떤 것, 내가 이렇게 표현하자 그는 적절한 비유라고 칭찬하면서 또 다른 비유를 했다. 
"그것은 내 진주알들을 꿰는, "그가 말했다. "줄 같은 것이지요!" 


그 밖의 <나사의 회전>은 유령이라는 존재를 끌어들여 가장 흥미롭고 미스터리한 공포 스릴러를 읽는 효과를 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가정교사가 쓴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과연 그녀는 귀신을 본 것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의 환상일까. 그녀가 가르치는 어린 두 제자는 과연 악에 붙들렸을까. 더 나아가 이 이야기가 러브 스토리로 읽을 수 있는가 등등.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소설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차분하고 냉정한 시선과 관찰로 쓰였으나 분위기로도 서늘한 감각을 선사한다. 의심의 의심이 거듭된 불신의 공포는 극대화되고, 선과 악의 대결 구도에서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짐을 경험한다. 마지막의 <정글의 짐승>은 얼핏 말장난 같은 허무와 안타까움을 전달한다. 자신 안에 자기도 모를 정글의 짐승 같은 본성이 숨어 있다고 고백한 남자, 존 마처를 옆에서 평생 관찰한 여성, 메이 바트램과의 관계를 그렸다.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감정을 안고 교류해 온 이 두 남녀의 관계는 여자의 죽음 앞에서 급물살을 타는 듯하더니 끝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남자의 미련함이 이 소설의 가장 참혹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깨달음을 던져준다. 


과거부터 그에게 벌어지기로 되어 있던 일은, 막 벌어지기 시작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죽어가는 그녀, 그녀의 죽음, 결과적인 그의 고독. 이것이야말로 그가 정글의 짐승으로 상상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신들의 무릎에 있는 것이었다. (273) 

그 순간, 존 마처에게 그처럼 피 흘리며 살아 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고통과 함께 전해져 왔다. (...) 그는 그 어떤 열정에 사로잡혀 본 적이 없었다. 사로잡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열정이다. 그는 살아남았고, 번민했지만, 그가 엄청난 파괴를 당했다는 흔적은 어디에 있는가? (중략) 그는 자기 인생의 바깥만 보아왔고, 인생의 내부로 들어가서 깨닫지는 못했다. 어떤 여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왔던 남자가 사별 후 그녀의 죽음을 깊이깊이 애도하는 방식으로, 삶의 내부를 깨우치지 못했다. (591) 

깨어남의 무서움-  이것이 깨달음이었다. 그 앎의 숨결 아래, 그의 눈에 맺힌 눈물들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눈물을 통하여 그 깨달음을 고정시키고 간직하려 했다. 그는 그것을 자기 앞에 간직하여 고통을 느끼고자 했다. 그것은 비록 때늦고 씁쓸한 것이었지만 삶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 그는 자기 인생의 정글을 보았고 거기에 잠복한 짐승을 보았다. (593) 






T.S 엘리엇은 헨리 제임스를 가리켜 "그 시대의 가장 지적인 작가이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작가이다."라고 칭송했다. 존 밸빌은 "소설은 헨리 제임스 이후 완전히 새로워졌다."라고 평했으며, 19세기의 리얼리즘이 지배하던 시대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대표되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원형을 제시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현대 영미 소설의 형식과 내용을 완성시켰고 무질서한 의식 세계를 언어로 형상화해냈다. 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 이전의 리얼리즘 사조와 달리 그는 소설가는 모든 것을 알기란 불가능하며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이외에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즉, 자아와 세상은 일치하지 않기에 그는 더욱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집중했다. 폭넓은 세상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개인의 내면 안에서 벌어지는 소외를 다루거나 그런 개인의 예민함, 감수성, 망상, 신경쇠약, 죽음 등을 묘사하며, '의식의 흐름' 기법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내면적 진실에 치중한 그의 소설은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며 제임스 조이스는 물론 마르셸 프루스트, 버지니아 울프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렇다고 화자가 자신의 내면에 확신을 가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본인조차 내면의 불일치를 경험하며 혼란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한 단면만을 보고 판단할 수 없는 여러 가지 혼재된 의미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는 <양탄자의 무늬>라는 소설도 썼듯이, 다양한 실과 무늬로 어둠과 밝음을 표현한 양탄자처럼 소설 속 인물과 사건 또한 여러 복잡한 감정과 갈등, 성격을 통해 발현되며 있음과 없음이 동시에 공존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예술이며 인생임을 은유한다. 


헨리 제임스는 1843년 뉴욕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부동산업, 운송업 등의 사업을 통해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고, 그의 아버지는 매달 들어오는 유산 덕분에 생업에 종사하기보다 철학에 매진했다.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난 헨리 제임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1890년대 초기 5년은 희곡에 몰두했으나 실패하고 그 이후 소설 집필에 집중했다. 생전에는 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지금과 걸맞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그런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세 여자가 있었으니 그중 한 명이 막내 여동생 앨리스 제임스이다. 평생 신경쇠약과 우울증으로 힘들어 한 여동생에게 자기 유산의 몫을 양보할 만큼 아꼈다고 한다. 다른 한 명은 두 살 아래 이종사촌 여동생 미니 템플로 <데이지 밀러>의 모델이 되며 <네 번의 만남>에도 영향을 줬다. 나머지 한 명은 콘스탄스 페니모어 울슨으로 그녀가 투신자살할 때까지 가깝게 사귀었으나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정글의 짐승>이라는 단편을 통해서도 눈여겨볼 수 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기 때문에 그의 성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논의되고 있다. <제자>와 <나사의 회전>은 그런 면에서 여전히 연구 텍스트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이며 외교관이었던 미국인 어만 너돌은 "제임스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여성은 상대방 여성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바라본다. 여성에게 내재된 성적 매력은 대부분의 남자에게 중요한 일차적 관심사이나, 제임스에게는 그것이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여성스러운 감성과 세밀한 관찰력을 통해 공감적인 소설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수록작 


네 번의 만남(1878) 

데이지 밀러 (1878)

제자 (1891)

실제와 똑같은 것 (1892)

중년 (1893)

양탄자의 무늬 (1896)

나사의 회전 (1898)

정글의 짐승 (1903) 

매거진의 이전글 플래너리 오코너의 선한 시골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