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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n 07. 2018

쿠라하시 유미코, 성소녀

#12_ "너를 생각하니까 나는 존재해"

'불가능한 사랑인 근친상간'을
'선택받은 사랑'으로 성화(聖化)시키고 싶었어요.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와 '미키'가 처음 만나는 장면을 잊지 못한다. 안개가 낀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미키를 차에 태워주며 두 사람은 만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미키는 자신의 엄마와 차를 타고 이동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가벼운 기억 상실에 걸린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쓴 일기장을 '나'에게 보여주는데, 그 안에서 미키와 아버지 파파와의 사랑이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들의 사랑, 그리고 '나'와 미키의 관계, 주인공 '나'를 통해 드러나는 사회적 분위기와 전말이 드러난다. 


 “그래서 근친상간은 보통 인간들에게는 금지되어 있는 거지. 이를 행할 자격이 있는 것은 자신의 오빠나 누이동생을 사랑할 수 있을 만한 정신적 에너지를 지닌 여자, 혹은 남자에게 한정되는 거죠. 이런 정신적인 왕족은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신에게 대항하여 자기들 또한 신의 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허용되는 거야. 그 외의 근친상간은, ‘에스키모’가 버스 안에서 말했듯이 숯 굽는 오두막이나 가난뱅이들이 벌이는 비천한 사건에 불과해. 나와 L의 경우도 그랬지.” 


<성소녀>는 성스러운 소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결함과 순수함을 지닌 소녀의 순결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동시에 외설적이다.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규정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이미지이기 때문일까. 성녀가 곧 창녀, 이 상반된 이미지는 당혹스럽다. 본능적으로 규격화된 환상, 비현실적 동화 같다. 성스러움의 반대는 더럽고 추한, 저속한, 천한, 상스러움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런 상반된 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은 주인공의 회상과 독백을 따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지만 미로를 헤매기 쉽다. 인간의 본성을 건드리면서, 소위 '이것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과거인지 현재인지, 꿈인지 실제인지, 소설 안인지, 소설 밖의 이야기인지 안개에 휩싸인 듯 모호하다. 가장 냉소적인 인물이 사물과 인물에 대해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끝의 결말은 허무함이 가득하다. 흡사 유령처럼 부유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같아 섬뜩하지만 묘하게 끌려간다. 어디인지 모를 그 끝을 향해.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고 들면, 그때 당신이 말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지는 일이 있는 거겠죠? 사랑이 생겨나는 일 역시.... ” 
“자진해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성녀가 되는 길인지도 몰라요.” 
“아마 미키는 그 성녀였던 거겠지.” 나는 말했다. “그리고 성녀에서 신으로.... ”
“성녀는 신이 될 수 없어. 성녀는 신에게 봉사하는 마조히스트인걸요. 당신의 L 씨는 성녀였나요?” 
“마녀였어요.” 나는 씁쓸하게 말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L은 나에게 마법을 걸어 유혹했지.” 






작가 쿠라하시 유미코는 2005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여전히 '전위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보기 드문 일본 여성 작가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은 1960~70년대 일본의 경제 버블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을 기반 삼아 전후 경제부흥을 통한 고도 성장기를 거친 일본은 미일 안보조약 반대운동 등의 정치적 요구가 분출하던 용광로 같은 시대였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은 일본의 전후 부흥을 세계에 각인시켰으며, 이후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는 경제적인 풍요로 갑작스레 침묵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젊은 세대의 상실감과 냉소주의, 하류 문화의 범람, 온갖 미국 브랜드로 치장된 일상을 그려냈다면, 쿠라하시 유미코 역시 한 발 앞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암시하며 공유했다고 볼 수 있다. 


“니힐리스트, 무신론자, 이런 것은 인간이 아냐, 짐승만도 못하다는 거지.”
“아나키스트.”
“아아, 그건 코뮤니스트보다 백배는 나빠. 변질자, 살인광 같은 것들과 동종으로 보이거든. 코뮤니스트는 영악스러운 악당이지만 꾹 참고 이야기를 못할 것까진 없는 상대지. 그런데 아나키스트라고 하면 폭행, 살인, 파괴를 주의로 삼는 미치광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진해서 아나키스트라는 둥 했다가는 이번 세기 안에 미국에 가긴 그른 거지. 그리고 호모 섹슈얼, 사디스트, 이건 절대 안 돼.”
“그래서 넌 에번스에게 뭐라고 했어?”
“저는 리버럴리스트예요, 했더니 좋아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전쟁 전후의 흔적이나 그림자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과의 독특한 거리감을 발생시킨다. 1960년대 '안보'를 배경 삼아 '나'라는 아나키스트인 지적인 대학생에 의해 이야기를 전개시키지만 정작 사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들이 느끼는 허무함과 상실감, 잔인하리만치 냉소적인 무관심은 시대적 분위기를 위한 배경에 머무른다. 어쩌면 작가는 당시 남성 작가들이 다루던 혁명을 비웃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속에 어디에도 여성이 끼어들 공간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끊임없이 '옹뜨(honte:치욕, 불명예, 수치심)'를 느끼지 않느냐고 묻는다. 자의식이 아닌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작가 쿠라하시 유미코는 주제보다 '스타일'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다. "소설이란 '언어'에 의해 '반(反) 세계'에 '형태'를 부여하는 마술이다. 문학은 이런저런 문제들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들을 이용하여 '반세계'의 존재를 표현하는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성소녀도 그러하듯, 현실 세계가 지닌 시간이나 공간, 혹은 인과 관계 같은 구체적인 질서와는 별개로 지극히 비현실성을 도입하여 '어디에도 없는 시공간', 즉 '반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는 일본 남성 작가 중심의 사소설적 리얼리티와 대척되는 세계라고 평한다.)  <성소녀>에서도 언어와 소설, 사랑, 폭력에 대한 다양한 관념적 담론을 작가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제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어째서 그런 것을 썼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일까요? 소설가는, 소설을 분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하는 업보를 돈과 연결함으로써 살고 있는 인간으로, 저에겐 이해 불가능한 종류의 인간에 속하지만, 아마추어의 경우,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고 싶다고 하는 충동에서 수기 같은 것을 쓰고,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변질되어 소설이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 그들에게 소설은 분명히 의식의 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는 그와는 다소 달랐습니다. 그 소설 (혹은 그냥, 그 노트)은 저에게는 주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듯싶었습니다. 제가 분비한 낱말은, 현실을 녹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아롱거리는 아지랑이 속에 저를 가두기 위한 주문이라고 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저는 그 소설에 의해 ‘불가능한 사랑’을 성화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의 어깨에서, 독사 같은 사랑으로 가득 찬 또 하나의 머리가 돋아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가짜 연인 파파를 사랑하기 위해서. 
파파를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사랑하는 것. 이 관념은 언제부터인가, 아직 아주 어린 제 머리에 깃들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파파가 그 커다란 손으로 내 몸통을 붙잡고 가볍게 허공으로 들어 올리고, 쿡쿡 웃어가며 작은 새가 부리로 쪼아대는 듯한 키스를 파파 입술에 해대던 내 버릇과 함께 깃들었던 것이겠지요. 저 뺨이니 살갗, 얇은 이마를 쪼아대며 컸습니다. 급속하게 성장하는 식물처럼. 그리고 제 머리가 파파의 쇄골에 닿은 어느 날, 저는 파파의 오래된 일기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작가의 문체는 섬세한 감성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힘을 지녔다. 특히, '작가'라는 별명을 지닌 여자와의 성적 관계를 식물의 소통으로 묘사한 장면은 정적이면서 숨 막히게 신비롭다. 성과 폭력, 폭력적인 성에 관해 차갑고 건조하게 묘사한 것과 반대로 몽환적이면서 관능적이다. 


그날 밤, 나는 그녀 곁에 있었다. 침대 위에 기다랗게 몸을 눕히고 자고 있는 그녀는 하나의 식물처럼 보였다. 이건 놀랄 만한 발견이었는데 그 뻣뻣한 짐승의 털에 싸인 ‘작가’의 머릿속에는 부드러운 꿈의 꽃들이 가득 차 있었고, 그러니 잠들어 있는 그녀는 틀림없이 식물이었다. 이것은 ‘작가’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가늘고 기다란 식물 하나. 손발톱도 없고 이빨도 없고 눈도 없다. 게다가 이 옅은 색 난 꽃은 아직 병(病) 기운 속에 그 뿌리를 담그고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어떤 불길한 전화가 한순간에 그녀를 묘비로 바꾸어놓았으리라. 그때 그녀는 치사량의 독약을 빨아들여 몸을 쇠하게 한 것이다. 차라리 연약한 줄기처럼 부러져버린 것이다. 나는 부러진 그녀를 똑바로 펴서 침대에 뉘어주었다. 그때부터 줄곧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그녀 옆으로 몸을 들여놓았다. 나는 자신의 몸이 서툴고 압박적인 어뢰를 닮았다고 느꼈다. 어떻게든 나도 부드러운 수피를 두른 식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금속성 회전음을 내는 심장의 엔진을 정지시키고 폐와 기관지 대신 피부로 호흡하고자 했고, 다리와 팔을 바람에 휘날리는 포플러처럼 부드럽게 만들고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근친상간이라는 금기를 통해 반추하듯, 인간과 사회를 들춰내는 소설은 무섭고 불편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게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인상에 사로잡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내가 읽고 있는 소설은 과연 진실일까. 진실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그건 중요할까. 소설을 읽는 내내 참과 거짓을 판명하려 애써보지만 뾰족한 답을 찾기 어렵다. 이상하게 슬프면서 공허한, 알 수 없는 정조에 휩싸여 소설에 푹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문제적이면서 동시에 전위적인 이 소설의 분위기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자의식으로 똘똘 뭉친 것처럼 보이는 소설을 러브 스토리로 읽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사회적 현상으로 인한 공통된 정서로 읽어야 할 것인가. 혹은 정신승리로 무장된 아무것도 아닌 소설로 판단해야 할 것인가. 혹은 반대편에서 그것을 조롱하기 위한 장치인가. 혼란스럽고 지금도 의문으로 남는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하나의 가설을 미키에게 설명한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섹스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 접합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라는 정의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다른 존재라고 하지만 거북이가 사자와 접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적어도 다른 존재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이 접합의 네거티브한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란, 자신의 한 조각인 (그런 한에서 바로 자신인) 다른 존재를 동경하지만 여기서 당연히 자신과 가까운 것과의 결합일수록 용이하고 적은 에너지만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렇게 가정해도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동물이 행하고 있듯이 근친끼리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것은 단순한 인력 법칙과 비슷하다. 그런데 자신과 동떨어진 존재와 결합하려면, 그리고 이 거리를 극복하려면 자연적인 인력과는 별개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반자연적인 에너지를 담당하게 되는 것은 가장 인간적인 무엇, 요컨대 ‘언어’ 일 것이다. 언어에 의해 비행하는 이 정신적인 에너지를 가리켜 일단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랑이란 결국 상상력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약간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 <성소녀>의 역자 후기를 참고하여 작성한 개인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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