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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 Jul 22. 2018

영화 <어느 가족>

#사적인 영화24: 간절하게 훔치고 싶은 그것.  

* 어디까지나 개인적이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7/26일 개봉 예정) 



우리는 곧 <어느 가족>의 일상을 엿보게 된다. 아빠와 엄마는 일용직으로 일하며 할머니의 연금은 가족의 중요한 생활비이다. 아빠와 아들은 마트에서 생필품과 먹거리를 훔쳐 가계에 보탠다. 엄마와 할머니는 이를 용인하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 이 평범해 보이지 않는 가족은 세상의 눈을 피해 조용히 은신하며 산다. 마치 그림자처럼, 세상은 그들이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다. 물론 가족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발 붙이고 서 있는 이 가족은 부끄러움도 죄책감도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 가족이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림자는 그림자를 알아보는 법. 어떤 사연인지 알 수 없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와 필요에 의해 이들은 가족이 된다.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사회에서 소외된 가장 낮은 하층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계약된 공동체를 이룬다. 아빠는 아이를 가르친다. 진열대 위의 물건은 아직 주인이 없으니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고, 집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만이 학교를 다닌다고. 음식은 대충 챙겨 먹으면 그만이고, 아프면 일은 쉬면 그만이고, 돈은 들어오면 좋고 안 들어와도 훔쳐 살면 그만이다.   



어느 한 겨울밤,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아들 쇼타(죠 카이리)는 추운데 바깥에 방치된 여자 아이 유리(사사키 미유)를 발견한다. 이번도 모른 채 지나가자고 쇼타가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오사무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간다. 제대로 밥도 못 먹어 깡마른 유리의 몸 여기저기 학대의 흔적이 달라붙어 있다. 아이가 마뜩지 않은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몇 번을 채근하여 유리를 원래 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나선다. 그러나 괜히 낳았다는 아이 부모의 말싸움을 듣고 이내 마음을 바꾼다. 그렇게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된 유리는 할머니(키키 키린)의 애정과 언니(마츠오카 마유)의 귀여움을 받으며, 오사무에게서 소매치기 기술을 배우게 되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러 형태의 가족 이야기를 다뤘다. <어느 가족>은 어떤 이야기일까, 촬영 소식부터 기대가 컸다. 무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을 듣고 더욱 기다렸다. <세 번째 살인>이 살짝 기대에 못 미쳤던 만큼, 가족 서사로 돌아온 것이 되려 반가웠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소재만 익숙했을 뿐, 영화는 되려 혼란스러웠다. 이 가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더욱 먹먹해졌다. 왜 원제가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일까. (직역하면 <좀도둑 가족>에 가깝다.) 훔친다. 무엇을? 아빠와 아들은 마트를 돌며 생필품을 훔친다. 아들과 가짜 여동생은 문구점에서 장난감과 사탕을 훔친다. 엄마는 세탁소에서 호주머니를 뒤져 손님이 흘린 것을 훔친다. 할머니는 사별한 남편의 다른 부인 아들을 찾아가 은연중의 돈을 요구한다. 그들 모두가 조금씩 훔치며 살아간다. 조금씩, 눈에 띄지 않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자그마한 것들을 훔치고, 그것을 생활비에 보태거나 작은 소유욕을 채운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훔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들이 진짜 '가족'을 갖고 싶었구나,라고 짐작했다. 

   

아빠 오사무는 기억이 없는 쇼타를 데리고 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주고, 유사 부자 관계처럼 쇼타를 아낀다. 유리는 친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고 린이라는 가짜 이름을 마음에 들어한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과 함께 살기를 선택한다. 유리와 같은 화상 자국을 가진 엄마 노부요는 유리에게 말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린다는 말은 거짓말이야. 진짜 사랑한다면 이렇게 안아줘야 해." 함께 살며 노부요는 친부모에게 학대받았어도 사랑을 베푸는 유리를 경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떤 희망이나 기대의 바람을 품은 사람처럼, 이런 우리라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진짜 가족'이라는 것을 말이다.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해 경계하고 뒤에서 남몰래 험담도 나누지만 이들은 각자 자신이 욕망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가질 수 없어 더욱 간절한 본능적인 몸짓, 혈연보다 더 진한 '정'으로 이어진 유대감을 갖고 싶어 한다. 



거짓으로 쌓인 모래성은 오래가지 않아 허물어진다.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상황은 급변한다. 여기에 쇼타의 성장도 한몫 거든다. 마치 갓 깨어난 새끼 오리가 처음 보는 동물은 무조건 엄마처럼 따르듯이, 쇼타 또한 오사무를 친아버지처럼 믿고 따른다. (물론 끝까지 오사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문구점 할아버지가 여동생 유리만큼은 물건을 훔치게 하지 말라는 조언을 듣거나, 차를 훔치려 하는 오사무를 보며 쇼타는 자기 안의 변화를 인지한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이게 맞는 일일까. 우리가 정말 가족이라 할 수 있을까. 물건을 훔치다 붙잡힌 쇼타를 두고 야반도주하려던 남은 가족은 적발되어 구속된다. 이제까지의 진실이 뿔뿔이 흩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취조 과정에서 노부요에게 "아이들이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길 바랬어요?"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몇 번을 머리를 뒤로 넘기는 척하며 눈가를 문지르고 문지른다. "그러게요. 걔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무리 문질러도 새어 나오는 눈물은 온 뺨을 적신다. 이 순간을 클로즈업한 배우 안도 사쿠라의 표정은 잊히지 않는다. 어떤 과장도 없이, 담담하고 태연한 듯, 애써 자신의 감정을 누르려 하지만 누를수록 가슴이 조여드는 아픔. 남들은 자연스럽게 갖고 있는 것들이 왜 그들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렇게 또 한 번 허를 찌른다. <어느 가족>은 가족의 허상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사회 구조에서 탄생된 기형적인 형태의 가족의 모습을 띄지만, 인간은 왜 그토록 가족을 이루려 하는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영화 후반의 취조 과정은 다소 작위적이었지만,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었다고 고백하는 오사무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다. 친부모에게 돌아간 뒤에도 여전히 베란다에서 서성이는 유리의 모습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쓰인다. 영화 안에서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목도하며 혼란스러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믿고 싶다. 첫 바다 여행의 다정했던 짧은 한 때의 그들의 웃음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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