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나는 원하는 대로 되지 못했다.
나는 실패했고, 쓸모없고, 멍청하고, 모자란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판결문에 서명했다.
나는 나를 실격 처리한 사람이었다.
자기 기대에 못 미친 자가,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버린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원한다.
성공을, 사랑을,
관계를, 성취를.
하지만,
그 원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어떤 사람은 현실이 아닌 자기 자신을 먼저 단죄한다.
“왜 난 안 되는 걸까.” “내가 모자라서 그렇겠지.” “나는 실패작이야.”
이런 자기 비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간 속에서 소리 없이 차곡차곡 쌓이며,
존재 전체에 부정적 낙인을 찍는다.
그 낙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되고,
세상을 해석하는 ‘렌즈’가 된다.
타인의 사정을 지우고,
나를 찌르는 내 해석.
타인이 나를 무시했다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한 번쯤은 나를 위해서라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나쁜 일, 힘든 상황, 짜증 나는 나날들.
나처럼 자존감이 낮고, 자기 단죄에 시달리고,
피해 의식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중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전후 사정은 싹 무시한 채로
덮어놓고 일방통행의 감정으로 “무시당했다”라고 결론짓는다.
이 조급하고 서투른 판단은, 결국 나도, 남도, 다치게 한다.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내가 이미 내린 결론이다.
상대가 인사를 안 했다,
메시지에 답장이 없다,
무표정하거나 반응이 없다,
그럴 때,
“저 사람도 나처럼 상황이 좋지 못한가 보다”
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대신 언제나 “나를 무시하네.” 이 생각이 먼저 온다.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나를 아프게 후려친다.
사실은 전날 아팠거나,
밤잠을 못 잤거나,
급한 일로 정신이 없었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삶일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일은,
상대를 위한 게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생존 훈련이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타인은 나를 무시할 틈조차 없이 자기 삶 버티기에 바쁘다.
그런데도 나는 타인의 무심함을 내 안의 상처와 결합해 ‘무시’로 해석한다.
이건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만들어진 내면의 시나리오가 타인의 행동을 끌어다 나를 찌르는 방식이다.
[피해망상이라는 렌즈]
나는 이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멍청하다.”
“나는 재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인간이다.”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이 결론을 내린 사람은 세상의 모든 피드백을 그 틀 안에 욱여넣는다.
그래서 타인의 사정은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의 고단함이나 아픔은 안중에도 없다.
모든 해석이 ‘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만 몰입된다.
이게 피해망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현실은 왜곡되고, 감정은 과잉되고,
삶은 점점 더 깊은 고립으로 빠져든다.
회복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허락에서 시작된다.
치유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타인을 설득하거나,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진짜 회복은 내 해석을 바꾸는 데서 시작된다.
“그 사람도 나처럼 지쳐 있었을 수도 있어.”
“그 사람에게 내 사정이 안 보이듯, 나도 그 사람의 사정을 알 수 없어.”
“모든 게 내 탓이라는 착각을 이제 멈추자.”
“나는 실패자가 아니야. 그냥 지금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야.”
“세상은 밤과 낮이 반반이니까,
지금이 어두운 만큼 밝은 날도 또 반정도로 올 거야.”
이런 해석은 나를 보호하고 지키는 가장 강력한 명약이다.
타인의 말이 나를 찌른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내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한 나에게 가장 가혹한 심판을 내린 재판관이었다.
그리고,
그 판결을 증명할 ‘증거’를 타인의 모든 행동에서 끌어다가 쌓아 올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
그 오래된 재판을 멈춰야 한다.
타인의 사정도, 나 자신의 존재도 모두 있는 그대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존재는 결과가 아니다. 존재는 조건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걸 믿는 순간, 다시 나로 살기 시작한다. 그제야 비로소 내 운명도 빛의 방향으로 바뀐다.
“자기를 무시한 뒤에야, 남도 그를 무시한다.” “自侮而後人侮之” –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