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주이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유되는 그 순간부터 상실의 가능성도 함께 품는다.
“이건 내 거야. 절대 잃으면 안 돼. 깨지면 안 되고, 변하면 안 되고, 떠나가서도 안 돼.”
우리는 그렇게 ‘소유’를 절대화하고, 그 절대화는 곧 불안과 고통을 불러들이는 시작점이 된다.
대부분은 쥐고 있던 것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쉽게 변하고, 얼마나 덧없고,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를.
세상에 완전한 소유란 없다.
“모든 존재는
생주이멸 한다
태어나고(生)
머물다(住)
서서히 변하고(異)
결국 사라진다(滅).
이 흐름은 피할 수 없는 본질이다.
우리가 손에 쥔 모든 것은 그 순간부터 소멸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늙어가기 시작하며, 존재는 언제나 생성과 동시에 소멸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잔 차(Ajahn Chah) 스님은
자신이 애용하던 유리잔을 들고 제자들에게 말했다. “이 유리잔은 이미 깨진 것이다.”
잔은 아직 온전했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그것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날 운명을 지녔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 유리잔이 자신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것이 깨졌을 때도 슬퍼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럴 수 있는 특성을 지닌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다.
유리잔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그것이 언젠가 깨질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다.
빛나고 예쁘지만, 언제든 부서질 수 있다는 속성 또한 그 안에 이미 담겨 있다.
건강, 젊음, 사랑, 관계, 물건, 그리고 이 하루까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집착 없는 소유만이 고통 없는 소유임을.
모든 소유는 무상함을 전제로 할 때에만 비로소 평온할 수 있다.
소유로 인해 생기는 아픔과 괴로움을 최소화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이다. 알고 소유해야 괴로움 없는 진짜 ‘가짐’이 된다.
그래서, 본질을 아는 순간부터 달라지게 된다.
소중히 간직하던 것을 잃었을 때조차도 고요히 받아들이게 된다.
잠시 속상할 수는 있어도 그 감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으니 몸이 상할 일도 없게 된다.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깨지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그 자체가 특성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삶도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깨어질 수 있는 유리잔임을 안다면, 우리는 집착하지 않게 되고, 그 끝이 다가왔을 때 더 부드럽게 놓아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본질을 아는 사람의 태도이며, 그런 사람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훨씬 더 깊은 심리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
생주이멸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오히려 덜 불안하고, 더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