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인생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
삶을 간직하기 위해 글을 쓴 다는 말이 왠지 유언장 제목 같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말을 쓴다는 것이니 유언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어쩌면 이 글이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언가를 고민하기도 한다. 살면서 누군가와 부딪쳐 미안하고 고마웠던 일이나 힘들고 아쉬웠던 순간들을 떠올려 쓴 내용이 그렇다. 60여 년 인생에서 꼭 하고 싶은 소회를 담으려 했으니 유언장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강의와 연구를 하던 일을 떠난 지 5년이다. 씨앗을 뿌려 가꾸며 분주하게 살던 농부가 추수를 마치고 텅 빈 논밭을 바라보는 심정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힘든 농사를 끝낸 보람도 느끼겠지만 졸업하고 떠나면 돌아올 수 없는 아쉬움도 있다. 교수의 삶이 생계를 위한 삶이었다면 현재는 생존을 위한 삶이다. 살기 위한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기도 하지만 마냥 자유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살아 있으니 산다는 기분이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을 들 때도 많다.
누구나 죽음은 싫어한다. 끔찍하고 두려워서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한다. 상상조차 하기 싫고 멀리하고 싶은 죽음이다. 까치는 길조라 좋아하고 까마귀는 흉조라 꺼리는 것도 죽음과 연관 때문이다. 죽은 동물을 먹는다는 까마귀가 불길하여 싫어하는 것이다. 행운의 상징하는 7은 좋아해도 죽음을 뜻하는 4는 없는 숫자처럼 취급하여 무시한다. 건물의 네 번째 층을 4층이 아닌 F층으로 표시하는 이유다. 어느 아파트 건물에나 4층은 있어도 없는 층이고 F층만 있다. 싫어하는 죽음을 삶에서 없는 것처럼 건너뛰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비이성적 판단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마치 어린아이가 무서운 동물을 보고 놀라 눈을 감는 모습처럼 보인다. 눈을 가리면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질 거라고 믿는 순진무구한 마음이 그렇다. 하지만 사나운 맹수를 만나 살아남는 지혜는 아니다. 피해 달아나거나 정면으로 직시하여 물리쳐야 한다. 심연의 물이 두려울 때 물속이 들여다 보이면 두려움은 사라지는 이치가 아닐까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도 그래야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모두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생명체로 살아간다. 생명의 건전지가 멈추는 순간까지 죽기 위해 사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눈을 가려 죽음을 외면할 게 아니라 가까이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 까닭이다. 실제로 내 인생에서 오늘 하루는 죽는 날을 향해 하루만큼 가까워진 셈이다. 하루의 죽음의 대가가 하루의 내 삶에 해당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지 죽음의 대가로 가치를 환산해 보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죽음을 피하고 외면할 게 아니라 언제든지 마주할 용기와 여유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이다.
나이 들수록 죽음뿐 아니라 절망과 좌절도 많이 겪게 된다. 성취와 성공에 집착하던 삶에서 체념이나 포기의 삶으로 변한다. 몸이 쇠퇴하고 마음이 귀찮게 여기는 탓도 있지만 그만큼 생존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생존에 필요한 욕망을 줄여 지혜롭게 사는 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의 힘이 부족해도 삶이 편해지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모습을 보면서 나이 듦을 한탄할 것만 아니다. 상실의 아픔이나 고통을 견디는 묘약이 바로 늙어감이 아닐까.
잃는 경험은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애틋한 사랑을 나누던 부모님과 영원한 작별을 포함해 아픔이 많았다. 정든 직장 동료와 동고동락하던 동창생이나 동호회 친구들과 헤어짐도 상실의 아픔이다.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도 이별의 슬픔을 달래야 한다면 상실의 고통이다. 지난 삶을 성찰하고 회한하며 못다 한 아쉬움과 소회를 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헤어지면 보고 싶고 그리워도 볼 수 없으니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흔적 없이 사라질 소중했던 기억들을 아쉬워하며 사는 인생이다.
하지만 시작이 있기에 끝도 맺어야 한다. 삶의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면 헤어질 용기를 내야 한다. 우주 자연 속에 생겨난 먼지나 점이 잠시 태어났다 사라지듯이 생이 죽음을 만날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한다. 죽음을 전제한 운명이기에 죽음을 인정하고 죽음의 진리에 담담하게 답하며 사는 것이 현명하게 사는 길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헛되지 않은 후회 없는 삶을 잘 살고 있다고 증명하고 싶어 글을 쓰고 있다. 아쉬움과 미련을 하나도 남김없이 털어내고 싶은 마음으로 삶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