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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Apr 17. 2023

돈의 노예처럼 사는 인생

자유 시장 논리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예전엔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는 말을 했다. 돈 욕심을 경계하고 돈 욕심을 부리는 사람을 속물로 여기던 시절엔 그랬다. 그런 관념이 이젠 사라진 것 같다. 삶의 도구로 여기던 돈이 삶의 목적으로 바뀐 것 같다. 능력 있는 사람이 돈을 벌던 사회를 지나 돈을 가진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한 세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사랑도 가능한 세상이 된 건 분명하다. 생각이나 감정마저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돈의 노예처럼 사는 인생이나 마찬가지다.


    요즘 아이들의 꿈이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존경하는 위인을 본받던 세대에서 부자를 꿈꾸는 세대로 바뀌었다. 훌륭한 인물 보다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재를 목표로 한다. 민주 시민으로 자립을 교육하기보다 자본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세뇌시키는 교육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학습 경험이나 스펙이 돈 버는 도구로써 상품 가치를 높이는 수단이 된 이상 생존을 위한 투자가 교육인 것이다. 프로 구단 선수뿐 아니라 어떤 직업이든 얼마를 벌 수 있는가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쏠려 있는 까닭이 아닐까.


    삶을 행복하게 느끼게 해주는 돈이다. 삶의 불행하게 만드는 돈이기도 하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생기는 불화의 근원에 돈에 대한 이해가 얽힌 경우가 허다하다. 돈에 의존한 삶이기에 의리나 정도 빼앗고 도덕이나 양심도 저버리게 만든다. 존중과 공경하는 마음에서 고개를 숙이던 사회가 돈이 아쉬워 굽신거리는 사회로 변했고, 돈의 노예로 돈에 목숨 건 사람들까지 생겨난 것이다. 치열한 자본 경쟁 사회가 만들어낸 잔인하고 처절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돈에 구속받으며 돈에 타협하며 살아온 내 인생이다. 돈에 대한 욕망과 자존으로 갈등을 벌인 적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시류에 순응했던 삶이다. 성공으로 돈을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족의 생계와 안위를 지키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던 것은 분명하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교수를 지냈지만 생존형 샐러리맨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부당하고 부조리한 사학재단에 침묵해 온 속물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내가 자본 사회를 사유하고 성찰하려 들다니! 쑥스럽고 민망하기 그지없다.


   소유의 자유는 성장과 발전으로 편리한 세상을 만든 건 사실이다. 경제 선진국에서 잘 살게 된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고층 빌딩을 세우고 수출 페달을 밟는 동안 손실을 입은 약자가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노인 빈곤과 자살이 세계 1위라는 불명예와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OECD국가라는 암울한 현실이 말해준다. 편리한 자동차 문명사회에 살면서 안전사고를 대비해야 하듯이 소외 계층에 대한 불균형을 해소해야만 한다. 경쟁으로 인한 양극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까닭이다. 


    6~70년대는 1,2차 산업에 의존하여 대다수가 힘들게 살았어도 불행과 불안은 덜 느꼈다. 상실과 소외의 고통은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다. GDP가 낮은 부탄이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것도 차별과 불평등이 적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 보장 제도가 삶을 행복하게 만든 것이다. 생존권 보장을 위해 소유의 자유는 정당한 권리지만 경쟁에서 남에게 해를 끼쳐 차지한 이익은 부당 행위일 뿐이다. 경쟁에서 불리한 약자들의 억울함과 상처를 치유할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성장과 발전은 사회 구성원들의 희생과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기득권 층에게 탈세나 탈법, 투기나 특혜마저 부를 독점할 수 있는 자유라 치부하며 눈 감아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평등의 가치가 보장된 구성원들이 불신과 불만의 원인이 차별과 불평등이다. 경쟁 사회를 독점하다시피 한 기득권층들이 정치와 언론을 장악하여 문화와 사회를 주도한 채, 공동체 사회에 대한 책무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현 정부 정책이 그렇다. 소득 누진세나 양곡 관리법으로 분배 균형으로 민생을 챙기는 일은 나 몰라라다. 소수의 이익을 위한 부자 감쇠나 근로 시간 연장 등 노동자 권리는 무시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나서 싸우거나 기울어진 경기장에 탈출할 엄두도 못 낸다. 오히려 기득권 세력이 외치는 자유를 자신들이 원하던 자유로 착각하고 그들에게 동조하는 편에 서 있다. 민생이 어떻게 되든 불법이나 위법으로 기득권 이익에 유리한 정책에 속아 넘어가는 이유다.


    지난 역사는 폭력은 폭력으로 흥망 하다 폭력으로 망했음을 증명해 준다.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짓밟던 독재 권력은 민주 시민운동으로 심판했고 단죄하기도 했다. 방송과 언론뿐 아니라 검찰력을 동원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권력의 미래도 머지않았다. 민주 사회 공동체 삶을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를 더 굳건하게 다져줄 뿐이다. 자본 갑질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본 지배에 순응하는 서민들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돈의 위력에 눌린 삶에서 대중들의 의식이 깨어다면 자본 지배 사회 구조도 변하게 되리라 믿는다.


    그들은 여전히 자본 경쟁의 정당성을 외쳐댄다. 경마나 복권뿐 아니라 트로트나 서바이벌 프로를 통해 대박의 꿈을 따라 부르라 소리친다. 누구든 수백억 빌딩 소유주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만든다. 현혹된 소비자는 456억에 목숨을 건 오징어 게임 참가자처럼 환호하고 열광하며 따라 부른다. 불빛만 보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죽음도 불사하고 뛰어드는 모습이다. 그들의 함정과 유혹에서 탄성과 함성이 멈출 수 있을 때 우리의 삶도 돈의 노예적 삶에서 자유를 찾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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