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길성 Jan 14. 2023

나이 들어 삶이 답답해지는 이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제맛을 낸다.

    나는 쌀밥이 좋다. 하얀 쌀밥에 청국장과 김치는 좋아하는 밥상이다. 콩자반이나 멸치조림도 좋아하지만 쌀밥에 먹을 때 제맛이다. 영양도 맛도 풍부해진 세상에 살면서 쌀밥 타령을 하는 이유가 있다. 보리를 삶은 소쿠리 꽁보리밥을 먹던 어릴 적이 생각난다. 가난의 멍에를 쓰고 살던 어린 시절에 쌀밥에 한이 맺혀 있어서다. 세월이 흘러도 마음의 상처나 그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기 마련이다. 가난과 무지로 노예처럼 힘들게 살던 기억은 잊을래 잊히지 않는다.


   6~70년대 농촌은 소처럼 일해야 먹고살았다.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을까 때마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보리밥을 주로 먹었고 감자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쌀밥은 제삿날에나 운 좋게 먹어볼 수 있는 것으로 부유한 집에서나 먹는 것이었다. 쌀이 부를 상징하는 귀한 것으로 부러운 대상이었다. 보리밥을 별미로 먹고 싶다는 사람은 지금도 얄밉다. 비만으로 고민하는 현대인이 못 먹고 자라 살이 찌지 않았던 과거가 그립다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쌀 가마니는 부를 나타내는 척도였다. 쌀 섬지기 농사를 짓는 부잣집은 그림의 떡으로 고된 노동으로 얹혀살 수밖에 없었다.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굶주린 배를 채우느라 처절하게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쌀밥을 먹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성장하는 나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 먹거리가 차고 넘치는 현실에 살면서 쌀밥에 한이 맺혀 못 잊는 이유다. 하지만 그런 쌀밥을 아직도 나는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당뇨 때문에 현미나 콩이 섞인 잡곡을 먹어야 한다는 아내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던 아내가 갑자기 변했다. 백반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친구가 소개한  'OO테라피' 유튜브 채널에서 "잡곡은 소화 불량으로 위장에 부담을 준다"는 말이 아내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이다. 평소 위장이 약한 자신에게 솔깃한 얘기로 와닿은 것이다. 쌀밥이 혈당을 높여 당뇨에 안 좋다는 금기조차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 셈이다. 요즘 유행하는 유튜버의 대단한 위력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원하던 쌀밥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되어 내겐 반가운 일이다.


    사람처럼 변하기 어려운 존재도 없다는 생각이다. 자신의 신념이나 습관을 쉽게 바꾸는 사람은 보기 드물기 때문이다. 36.5도 체온을 변함없이 유지하는 것처럼 마음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습성을 지닌 게 사람이다. 연륜이 쌓여 경험이나 지식이 쌓이면 삶도 지혜롭게 변할 것 같지만 사람은 상대적으로 그 반대가 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성경 말씀을 어기고 고장 난 부대를 자꾸만 고집하는 게 사람이 아닌가 싶다. 생활 수준이 나아지고 좋아져도 변화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것이 사람이 아닌가 싶다.  

   

   불과 5~60년 동안 사회는 엄청나게 변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현실이 됐다. 문명의 진화로 인한 것도 많지만 현실에 대한 저항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부당한 탄압이나 불의 맞서 싸워 승리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식민 독재 권력에게 굴종하고 맹신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일이다. 암울하고 불행한 삶에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등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워라밸 시대에 살게 된 배경에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안타깝게도 우매한 과거를 목놓아 외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주당 62시간 노동을 주장하고 노동 연대를 묵살하는 구태 정책을 다시 꺼내 들고 있다. 핵무장과 선제 타격을 운운하고 정적을 악의 존재로 몰아 공격하기도 한다. 선진 문명으로 향해 달리던 사회를 멈춰 세우고 정권 탐욕에 눈이 멀어 퇴행의 길로 향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유지에 악용하는 구시대 악령이 살아나는 듯하다. 검사 공권력을 동원하여 정적을 숨죽이게 만들어 정권이 군사 독재 시절의 악령이 살아나는 것 같아 심히 우려가 된다.


    휴대폰 하나로 세상과 소통하는 편리해진 세상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정보를 AI와 빅데이터가 알려주는 현실에 살고 있다. 하지만 올드 세대처럼 미디어 문해력이 떨어진 사람에겐 답답한 세상이기도 하다. 택시 앱이 없으면 택시 잡기가 어렵고 밀키트 요리를 모르면 음식 대접에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내비게이터를 사용 못하는 세대에게 내비게이터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아날로그 세대들에게 디지털 세상은 뻘쭘한 아웃 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런 것은 아닐까. 딱딱하게 굳어버린 부대에 술을 담는 이들이 지배하는 현실이다. 견제나 비판 기능을 상실한 기업 언론과 포털, 그들과 손잡고 한편이 되어 용비어천가를 따라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무능한 대통령을 뽑아놓고 막말 외교로 국제적 망신과 조롱거리가 된 지도자에 비호하는 모습이 개탄스럽다. 10.29 참사에 책임을 회피하고 민생에 헛발질하는 정부에 장단 맞추는 모습이 볼성사납기만 하다. 자나 깨나 수구지심만 외쳐대며 부화뇌동하는 기성세대들의 비애가 아닌가 싶다.


    균형 있는 시사나 교양 프로가 사라진 탓만 해도 그렇다. 미디어가 정파나 기업 전단 광고지로 전락한 언론 환경 탓이기도 하다. 트로트 서바이벌 경쟁이나 연예 오락에 시청률 경쟁으로 대중을 매수하는 미디어 시장에 쏠려 있는 탓이다. 무고한 대중들을 자본 경쟁에 끼어들여 양극화 차별화 정당화에 도구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이다. 자본 권력이 주도하는 불공정 사회에 세뇌되면 미래는 뻔하다. 역사가 증명하듯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막는 방해꾼들이 지배해 왔다. 기득권 세력의 혹세무민에 더 이상 현혹되면 안 되는 이유다.

작가의 이전글 부부로 사는 인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