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박달재 리솜 리조트를 다녀왔다. 제천은 결혼 30주년이 되던 해에 아내와 갔던 곳이다. 적막이 흐르던 산속에 리조트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 따스한 추억을 잊지 못하던 장모를 위해 사위가 챙겨준 선물 덕이다. 청정한 공기와 한적한 분위기, 특히 찜질방 못지않은 온기로 가득한 숙소가 맘에 쏙 들어하는 아내였다. 우리 가족은 제천의 의림지에서 차도 마시고 카우보이 그릴의 바비큐 요리도 맘껏 즐겼다. 결혼 50주년이 되어 다시 찾아가도 산 꼭대기에서 보던 별빛이 여전히 유난히 밝게 느껴질까.
부부로 사는 인생은 사랑 이야기와 같다. 부부가 서로 일상에 나누는 대화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영화나 TV 드라마 속 주인공이 사는 모습처럼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사는 모습이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에 사랑 이야기가 빠지면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다. 소설이나 영화에 관심도 없어지고 읽거나 즐기지도 않을 것이다. 부부가 사는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부가 서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함께 사는 인생의 의미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부생활이 힘든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서로 이해하고 도와주는 마음으로 살고 싶어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대 기대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 채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구걸하는 모습이나 다름없다. 결혼할 때 서로 좋아 '한결같은 사랑'을 약속해 놓고 지키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겠다는 실현 불가능한 언약에 얽매여 지치거나 상처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내를 만난 지 40년이 됐다. 세 자녀를 낳아 길러 두 딸은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예쁜 손자와 손녀도 있고, 5월이면 둘째 딸 손자가 태어날 예정이다. 듬직한 늦둥이 아들 녀석은 이제 취업 준비생이 되기도 한다. 자식이 평온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부부에게 다행스러운 일도 없다. 자식 농사로 치면 우리의 40년 결혼 생활은 성공한 셈이다. 그동안 거센 파도와 풍랑에 휘청대고 고생한 적은 있어도 나약하고 미숙한 시절의 사랑 이야기로 기억하고 싶다.
결혼생활은 단편 인생극과 같다. 아내와 남편은 인생 동업자로서 공동 주연 배우다. 누구나 인생은 자신이 인생 주인공으로 살다가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게 된다. 끝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결국 부부가 함께 사는 동안 부부 인생극의 희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희극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조차 65% 정도밖에 안 된다. 인생 동반자 약속을 어기는 부부가 35%나 되기 때문이다. 공동 주연 인생극을 살면서 모노드라마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부부가 그 정도로 많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부부 사랑 이야기를 희극으로 맺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서로 다른 상대의 성격과 가치관, 기호나 취향을 무시하고 자기식으로 고치려는 것이 부부 갈등의 주된 원인이 아닌가 싶다. 신인 배우 시절엔 어떤 배역도 사랑과 열정으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사랑으로 감싸던 시절이니 가능한 일이다. 생소한 무대와 조명, 조연이나 스텝이 불편하고 낯설어도 설렘으로 받아들였던 셈이다. 결혼 생활에서 신혼의 달콤한 향기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다.
성숙한 연기자로 성장한 주연급이 되면 부부 마음도 변한다. 인기가 올라가고 배우로서 안목이 생기면 캐릭터에 맞는 배역을 맡고 싶기도 하다. 환한 불빛 아래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어도 쑥스럼 없이 대역 없는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신인 배우가 함부로 배역을 맡지 않는 스타처럼 행동하게 된다.부부가 사는 모습이 그런 것이 아닐까. 자기가 주인공 역할을 잘해서 부부 인생극이 성공한 줄로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악역이나 궂은 역도 마다하지 않던 신혼 시절을 까맣게 잊고 지낸다.
40년 세월은 엄청난 변화를 줬다. 20대 상큼한 숙녀가 경로우대 할머니로 만들었고, 조리책을 보고 라면 끓이던 새내기 주부를 50 포기 김장을 거뜬히 해치우는 베테랑 주부로 변하게 만들었다. 바쁜 삶에 지치고 피곤할 법도 한데 외출하자면 생동감 넘치던 감성 소녀를 성장을 멈추고 동면을 준비하는 얌전한 아기곰처럼 변하게 만들었다. 아내에게 느끼는 사랑에 온도 차이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도 서로 아끼고 서로 소중한 존재로 인정해주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노트북 가방을 메고 나설 때 세탁해 놓은 마스크부터 챙겨주는 아내다. 저녁에 문을 열면 새장에서 잠자던 앵무새가 깨어나 주인공을 반겨주듯 기분을 좋게 해주는 아내다. 하루 일상을 신나게 털어놓으며 애틋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는 아내다. 아내는 시시콜콜 사는 얘기를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40년 부부 경험에서 터득한 우리 부부의 사랑 이야기 방식이다. 무대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우리 부부의 공동 주연 인생극은 그렇게 써 내려갈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