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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Dec 20. 2022

지워버리고 싶은 지난날

생각조차 하기 싫어지는 불행했던 경험

     기온이 뚝 떨어져 전방 시절이 기억난다. 79년 15사단 병영 생활은 참으로 혹독한 겨울이었다. 내무반은 도둑놈 소굴처럼 어두웠다. 홍o표라는 선임병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저녁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원산폭격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악질 선임병에게 당한 상처가 잊히지 않는다. 생트집으로 못살게 굴던 그가 짜증 나는 것도 있지만 내겐 악마나 다름없었던 그가 지금은 까맣게 잊은 채 잘 살 거라는 생각을 하면 분하기도 하다.


     독일 나치 정권 시절 아돌프 아이히만이 그랬다 한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백만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악랄한 살인범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가정으로 돌아간 아이히만은 부드러운 남편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한다. 전범 재판에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잔인한 살인자로 밝혀내기 전까지 그는 평범한 노동자로서 살았던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던 잔혹한 살인마였지만 정작 자신은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했던 군인으로 알고 지냈기에 보통의 시민으로서 평온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폭력으로 남을 괴롭히고도 태연한 이들이 한 둘은 아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억울한 피해를 입은 사람도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군사 정권 시절의 군대 문화가 삶 구석구석에 배어 있질 않던가. 군대처럼 싸워서 이겨야 살아남는 사회로 인식하며 오랜동안 살아왔다. 상명하복에 의한 군기를 받들고, 강자에 억눌려 복종하는 문화에 익숙하게 지배를 받아왔던 것이 사실이다. 폭력이나 무력이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는 풍토가 깔려 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기 조차 하기 싫은 서글픈 지난날이다.


    불행했던 지난날은 가정이나 학교, 직장 등 사회 곳곳에 폭력과 폭행이 난무했다. 선생님이 아이를 훈육하는데 회초리를 들었고, 선배가 후배를 구타하는 것이 전통처럼 여기는 학교가 있었다. 폭력이 마치 연대와 결속을 다지고 의리를 상징하는 양 자랑처럼 여기고 눈을 감아 줬던 셈이다.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줜 정권 시절이었으니 폭력은 범죄가 아닌 억압과 통제 수단으로 정당하게 여겼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인격을 무시하고 인권을 탄압하는 행위가 중죄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어리석은 지난날이 아니었나 싶다.


     80년대 군사 정권의 인권 유린 행위는 극에 달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군사력을 동원하여 사회를 장악하던 시절이 그랬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한다는 명분 하에 국가 폭력을 정당화시켰다. 실제로 조직 폭력배나 범법 행위자, 집권 세력에 불평불만을 가진 사람 모두 삼청교육대에 강제로 끌고 갔다. 사회악을 제거한다는 명분 하에 정권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잡아 곤욕을 치르게 했다. 그 당시 보안사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인권이 짓밟힌 사람이 4만 명에 이른다. 끔찍한 장면은 근무하던 전방 부대에서 볼 수 있었다.


    민주 정권이 집권하면서 폭력은 줄었다. 하지만 폭력에 의한 상처가 치유되거나 불안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무지몽매한 시절의 충격과 공포는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불안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분단 트라우마가 대표적인 예다. '종북'은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불안을 조장해온 주범이다. 군사문화에 세뇌당해 침묵하며 살아야 했던 지금까지가 그렇다. 군대에서 적을 향해 총을 겨누던 시민조차 종북 프레임을 씌어 공격하는 이념 갈등이 심각한 대한민국이다. 깨어난 의식으로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에도 과거 세대는 과거를 자랑스럽게만 여기려 든다. 식민 지배 시대나 다를 바 없는 암울했던 군부 독재마저 미화하려 든다. 폭압적 비민주적인 군사 정권 시절이 사회가 안전했고 물가가 안정되어 좋았다고 그리워하는 이들이 그러하다. 어두운 질곡 속에서 숨죽여 살았던 처절했던 지난날에 향수를 느끼는 모습이 안타깝다. 지난 경험이 있었기에 현재나 미래도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미래는 기득권 세력이 만들진 않는다. 미래는 언제나 기득권의 폭력에 맞서 싸운 저항 시민의 노력이 만들어 왔다.


     남을 무시하거나 해치는 나쁜 짓이 폭력이다. 폭력 범죄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 국가가 정한 법률이다. 국가가 정한 책임을 다하지 못해 피해를 입혔다면 그 또한 범죄 행위로 처벌받아 마땅한 일이다. 158명의 젊은이들이 생명을 빼앗아간 이태원 참사가 그렇다. 시민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않고 죽음을 방관한 탓에 발생된 끔찍한 참사였다. 그러나 재앙의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가 없다 한다. 참사를 사고라 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라 은폐하며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현실이다.


    수단과 방법조차 가릴 줄 모르던 우매한 시절엔 국가 폭력에 억울함을 당하고 살았다. 국가와 국민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한 힘이 국가 폭력(법)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믿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보루가 법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권한이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다. 철 모르는 5살 아이가 국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요즘이 그런 생각이 든다. 민주 정치에 일도 모르는  정부가 검찰 권력으로 애써 가꿔온 민주주의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이 그렇게 느껴진다.


    지은 죄가 없어도 무기로 위협하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다. 비겁하고 비굴해도 생존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숨어 사는 수밖에 없다. 폭력이 만연하던 과거 군사 정권 시절에 그랬다. 맷집을 키우거나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부끄럽지만 총칼 앞에 인권이나 자유가 없던 처참한 지난날이 그랬다. 한데 현대는 군사력 대신 검찰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위협하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죄인을 만들겠다고 겁을 준다. 막대기를 휘두르는 무서운 아이한테 찔리기 전에 막대기를 뺏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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