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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Dec 02. 2022

한 번 뿐인 인생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까

     세포가 줄어들고 생존력이 떨어지는 것이 병이 아니다. 자연 현상일 뿐이다. 꽃이 피면 시들고 세월이 흘러 계절이 바뀌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이고 낡고 닮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모든 생물이 그러하듯 인생도 자연의 원리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리는 시한부 인생처럼 살아야 한다. 하루의 죽음을 소비한 대가로 하루의 인생을 사는 셈이다. 내 인생에서 하루는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한 번 뿐인 인생. 대충 살면 안 되는 까닭이다. 공평한 기회를 놓치지 말고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 죽음을 앞둔 소중한 삶이 아까워서라도 원하는 삶을 마음껏 누리고 살아야 한다. 누가 뭐래도 죽음보다 불행한 일은 없다. 살아 있다는 사실만큼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은 없다. 아무런 고통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저 세상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허상 속 세계임에도 모두가 꺼린다. 삶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 번 뿐인 인생이 나에게 그만큼 소중한 이유이다. 


    사실 사후의 세계처럼 현실 삶과 동떨어진 세계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일상생활은 이미 환상 속 세계를 수없이 체험하며 살고 있다. 종교와 문화, 미디어 세계가 보여주는 가상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는 삶인지 미디어 세계에 의존하다시피 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 세상에 둘러싸여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모습이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삶의 방식이라 여기고 사는 모습이다. 그러한 모습으로 살면서도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마치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이 된 기분으로 사는 격이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임에도 상상 속에 있던 기억조차 자신의 삶처럼 인식하고 사는 격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고 즐겨보는 것도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허구적 스토리 주인공이 되어 대리 만족을 느끼고 싶어 한다. 실패나 좌절, 역경을 이겨내고 성취와 성공을 일궈낸 드라마 주인공처럼 극적인 삶을 희망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셈이다. TV나 영화, 휴대폰이나 유튜브 등에 빠져 사는 이유가 아닐까.


    현실에서 다가서기 어려운 자신의 욕망을 어디선가 충족시키려 하는 것이 본능이다. 본능을 추구하는 인생인 것이다. 하고 싶은 무언가를 성취하고 부족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사는 게 인생이다. 생존에 필요한 돈, 성, 사랑, 지식,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삶의 전부인 양 알고 살고 있다. 하지만  결핍된 욕망을 채우는 것이 인생의 목적일까. 아니라는 생각이다. 삶의 목적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다. 생존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살 뿐이다. 사는 게 인생의 목적이자 삶이다.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서서히 기울고 있는 몸에 익숙해진 탓에 불편이라 여기지 않을 뿐 많이 아둔해진 게 사실이다. 가려워 긁었던 피부 염증이 1년 넘게 피부 연고를 발라도 나을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낮은 턱에 발을 디딜 때 몸이 균형을 잃고 '아차!'싶은 순간마다 '이제 몸을 조심해야 할 때가 됐구나'하고 경고장을 받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움츠려 들곤 한다. 식당에 좌식 식탁이 사라진 것이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앉아 있다 일어서기만 해도 몸이 뻐근한 사람한테 반가운 일이다.


    현대 일상생활에 여로모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세대다. 좋아하던 테니스 라켓을 놓은 지 5년이 넘었고, 가족이 모여 함께 즐기던 윷놀이나 고스톱 놀이에 끼고 싶어도 끼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몸이 노화되면 마음도 위축되기 마련인데, 마음은 아직 아니라고 우기고 싶어도 어쩌겠는가. 그래도 다행이라 여기는 것은 이틀에 한 번 헬스장 기구에 매달려하는 근력 운동과 저녁마다 하는 걷기 운동이다. 이만하면 아직은 괜찮다 싶다. 심한 운동이 부담스러울 뿐 아직은 건강이 양호한 편이라 자위하고 싶다.


   걸음걸이는 건강의 척도라 믿는다. 몸이 불편하면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워지고 거동이 어색해지기 때문이다. 내 건강이 아직은 멀쩡하다고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침마다 혈압 당뇨약을 만병통치약인 양 챙겨 먹기 시작하면서 걷기 운동도 시작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도 끝장이다는 마음으로 걷는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은 소용없게 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걸을 수 없으면 내 인생도 종을 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걷기 운동에서 건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면 사회적 사망 선고나 다름없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 인생의 소중한 의미라 할 수 있는 정 나누기 삶을 포기한 삶이나 다름없다. 의학이나 약물에 의존해 연명하는 생은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없다. 나 자신은 어머님의 마지막 생을 연명치료에 맡긴 적이 있지만 내 삶은 연명에 의존한 삶을 원치 않는다. 생사의 기로에서 이별의 정을 달래는 정 떼기 따위는 부질없는 행위라 생각한다. 서로에게 슬픔과 고통을 떠안게 만드는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한다.


   10년 전 급체로 기도가 막혀 사경을 헤맨 기억이 있다. 응급차 산소 호흡기에 목숨을 매단 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경험을 했다. 수분이 안 되는 순간의 처절한 경험이었지만 '이렇게 죽고 나면 어린 자식과 아내는 어떡하지'라는 생각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 때 내 마음속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연민의 끈에 묶여 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생과 사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오늘 하루를 소중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기에 행복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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