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기'를 좋아하는 한국사회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

by 최길성

취미든 오락이든 내기를 해야 재미는 있다. 기원에 가면 방내기가 기본이다. 테니스는 타이틀을 건 게임을 주로 한다. 당구도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끼리 치다 보면 내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다.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내기를 걸고 하자는 얘기로 시작된다. 게임비든 치킨이든 걸고 하는 게임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내기를 즐기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지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다. 돈 몇 천 원이 걸려도 내기는 내기다. 이기는 승부에 집착하게 된다. 긴장감을 즐기려고 시작한 승부의 뒤끝이 개운한 경우는 별로 없다. 승자는 있지만 승자에게 축하해주는 패자를 보기는 어렵다. 내가 내기 게임을 피하는 까닭이다.


한국사회는 경쟁을 능사로 여기는 사회라 할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한다. 과히 경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 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경쟁이 당연한 생존 논리처럼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인구가 많고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 살면서 경쟁을 삶의 방식처럼 알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국은 불과 50여 년 만에 최고 가난한 나라에서 경제 선진국으로 성장했다. 국제 사회가 글로벌 경쟁체제가 되면서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온 한국 사회가 선진 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며 국제 사회 경쟁력을 한국이기에 가능한 결과다.


경쟁에 매몰된 한국 사회는 '빨리빨리'가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상징어가 되었다. 뭐든 빨리하는 것을 경쟁력으로 안다. 속도전을 생존 비책이나 무기처럼 생각한다. 그런 의식이 한국인의 일상생활이 되어버린 셈이다. 바쁠 게 없어도 타려던 엘리베이터 문이 타기 전에 닫혀 버리면 속상한 한국인들이다. 문화뿐 아니라 뭐든 빨라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급속 충전이나 속성 과외처럼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는 것을 찾는다. 속전속결의 배달 서비스는 단연코 세계 제일이 아닐까 싶다. 조직사회에서 빠른 판단력과 빠른 실행력은 성공 비결이기도 하다. 속도 경쟁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흔히 '잘하는 사람이 승자가 아니라 승자가 잘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을 한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고, 뭐든지 이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달리 표현하면 서열을 정해 놓고 차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소위 SKY 입학생을 몇 명 배출시켰냐를 기준으로 명문고 서열을 매겨는 사회다. 유수 언론지가 그런 발표를 해도 비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다. 또한 미스/미스터 트로트 프로처럼 1위를 놓고 치열하게 자리 경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에 모두가 중독되어 있는 나라다. 경쟁이 몸에 배어 대중문화가 된 것이다. 부모 찬스가 개인의 능력처럼 생각하고 아부를 경쟁력으로 이해하는 씁쓸한 사회다. 모두가 경쟁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경쟁을 능사로 알고 있는 사회라 할 만하다.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1등을 추켜세우는 사회는 1등을 제외한 나머지의 불행은 당연한 결과로 인식한다. 차별이나 무시가 정당화된다. 1등을 차지하면 우월감에 젖고 절대 다수인 나머지는 희생자다. 열등감과 패배감을 경험한 희생자나 다름없다. 인간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경쟁 사회의 모순이다. 잘하는 것과 이기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1위가 아니어도 최고인 경우는 많다. 시청률 경쟁에서 1위를 차지한 드라마가 가장 우수하거나 좋은 프로는 아니다. 선정적인 막장 드라마도 대중적 인기몰이에 성공하여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다. 자본 언론이 광고수익을 챙기려고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이전투구장에 대중 소비자들까지 끌어들여 단순 소비자로 전락케 만드는 현실이 안타깝다.


경쟁은 자유 자본시장의 지배 논리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수단이다. 경쟁에 따른 불평등 혹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전체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와 평등한 삶을 가로막는 방해물이나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 현상을 가져온 주범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경쟁을 능사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경쟁만이 마치 진리인 양 믿고 맹목적으로 따르던 우리 스스로가 공범이었던 셈이다.


경쟁만이 능사이거나 경쟁이 최선일 순 없다. 자유 자본시장의 경쟁 논리는 링 위로 떠밀어 놓고 죽지 않으려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한다는 주장이나 다르지 않다. 소외와 상실로 억울해도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삶이 그러하다. 개인이 불행한 원인은 경쟁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비롯된다. 지배 구조가 아닌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경쟁 사회라 할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삼아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다. 지배 논리에 맞서 싸우지 못할 망정 장단에 맞춰 박수를 치는 격이다. 자본 위세와 위계에 눌려 억압받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세뇌된 우리의 현실이 자꾸만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경쟁 욕구는 누가 부추기거나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된다. 사회가 개인의 경쟁을 부추기고 강요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본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해주면 족한 일이다. 인간은 스스로 성장을 위해 먹고 자고 싶어 하듯이 생존에 필요한 능력을 스스로 키우려는 욕구를 지닌 존재다. 누구나 경쟁을 시키지 않아도 행복한 삶을 추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독일처럼 경쟁을 부추기지 않아도 잘 사는 나라는 얼마든지 있다. 학교에서 우열을 가리거나 경쟁심을 유도하지 않아도 경쟁력이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은 여러 사례에서 입증된 일이다.


자유 시장 논리에서 경쟁은 차별을 정당화하고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 사회를 가속화시킬 뿐이다. 서민들의 삶이 더 처참해지고 공동체가 붕괴되기 마련이다. 어제의 동료가 경쟁 상대로 돌변하여 서로를 적으로 공격하는 사회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희생되지 않으려고 상대를 공격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상대에게 돌리는 야박한 사회가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 사회이다. 각박하고 처절한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김연아 선수가 세계 최고의 피겨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을까. 아사다 마오라는 일본 선수가 경쟁 상대로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상대 선수와 라이벌 의식에 사로잡혀 경기를 했다면 세계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방송이나 언론에서 라이벌 경쟁을 자극한 것처럼 경기를 펼쳤다면 심적 부담으로 그런 경기 결과가 나타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김연아 선수의 경기 결과는 상대와 싸워 이긴 결과라기보다 자신의 한계와 싸워 승리한 결과다. 자신의 목표를 정해 놓고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코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대표팀은 12개 종목에서 4위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메달을 딴 선수와 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금메달 개수로 국가 순위를 정하는 기준에 집착해 은메달이나 동메달마저 푸대접하던 과거와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승자인 금메달리스트만을 추켜세우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노메달의 영웅들을 탄생시킨 의미 있는 경기가 아니었나 싶다. 경쟁에서 최고만 살아남지 않음을 보여준 값진 올림픽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를 쓰러뜨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쟁 이데올로기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로 가는 길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에 지쳐 피로한 사회가 될 뿐이다. 링에서 상대방을 때려눕혀 승리를 했다 하여 쾌거를 부른다고 상대방의 패배감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없다. 이기려고 죽도록 매를 맞아 얼룩진 서로의 상처만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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