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던 사람들

베이비 붐 세대들의 자화상

by 최길성



70년대 초 기억이다. 아이가 어른 옷을 입은 그림 포스터가 어렴풋이 생각난다. 벽보나 가정에 보내는 통신문에 실려 널리 퍼져 있었다. 우리 실정에 맞는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자는 취지가 담긴 홍보물이었다. 봉건적인 사고를 새로운 사고로 바꾸자는 마음가짐이 유신의 기본정신이고, 유신 정신이 반영된 유신 헌법을 홍보하기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를 홍보하는 그림이 배포된 것이다. 유신헌법에는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과 경제적 평등을 실현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당시 유권자 입장에서 그런 유신헌법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더구나 개헌에 반대하면 평화통일을 반대하는 것이고, 경제적 불평등에 찬성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특별한 시민의식이나 장기집권에 반대하는 유권자가 아니라면 반대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실제 국민투표 결과도 그렇게 나타났다. 유권자 91.9%가 투표에 참여하여, 그중 91.5%가 찬성에 표를 던졌다. 당시 유권자는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투표 결과만 보면 베이비 붐 이전 세대들 대다수가 유신헌법 개헌에 찬성표를 던진 셈이다. 지긋지긋한 전쟁과 가난을 겪었던 세대로서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것은 베이비 붐 세대들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 후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는 반공 반첩 세대라 할 수 있다.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틈만 나면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가 김일성’을 외치며 성장한 사람들이다. 유신개헌 당시 정치나 사회, 세상 물정을 모르는 시절이었어도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말에는 왠지 친숙함을 느끼는 세대다. 학창 시절 숱하게 배우고 들었던 말이고, 국민교육헌장 이념이 뇌리에 박혀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한국에 맞는 민주주의를 한다는 말은 ‘신토불이’라는 말처럼 긍정어로 들린다. 그런 유신헌법은 1986년 민주화 운동으로 폐기됐지만 제8대~제12대 대통령 집권 기간의 대한민국 헌법이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한국적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말 자체가 기분 나쁘게 들린다. 근사한 옷이지만 한국인에겐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는 표현이 어이가 없다. 한국에 민주주의 도입이 시기상조라는 주장에 납득할 수 없다.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만큼 기분 나쁜 일은 없다. 자신을 깔보는데 불쾌함을 느끼지 못하면 스스로 바보를 인정하는 꼴이다. 친일파 주장처럼 조선인들이 못나서 일제의 노예로 살아왔음을 자인하는 격이다.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껴 스스로 정체성을 부정하고 싶었던 친일 정권이면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일제의 신민화 수법을 개헌 홍보에 그대로 이용한 것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든다.


몸에 맞는 옷을 입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친일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초헌법적 권위를 지닌 국민교육헌장 이념이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태다. 국민교육헌장이 그들의 태도와 가치관을 개조한 셈이다. 자신의 존재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존재로 인식할 뿐 아니라,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닫는’ 투철한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이다. 통치자에 순응하고 맹신하는 순종적 인간형으로 교화된 상태나 다름없다.


국민교육헌장은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떠 만든 문장이다. 교육칙어는 일본 천황을 신격화하기 위해 황국신민들이 지녀야 할 기본자세를 가르치던 규범이다. 해방이 된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일제가 조선인을 식민지 노예로 삼기 위해 세뇌시키던 수법을 답습하려 했던 것이다. 국민의례도 마찬가지다. 단체의 공식 행사 때마다 여전히 빠지지 않고 의무 절차로 이행하고 있지만, 일본 천황에 대해 황국신민이 바치는 충성 선언문을 받아쓰기한 것에 불과하다. 국민교육헌장은 95년 YS정부 때 없어져 다행이다. 하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유치원 행사조차 하고 있다.


일제에서 유래된 또 다른 폐해가 배타적 사회주의다. 일명 빨갱이 공포증이다. 일제가 독립군을 감시하고 억압하기 위해 독립 운동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해방 후 일본 앞잡이 역할을 했던 친일 세력이 이용한 방법도 이와 비슷하다. 사회주의 노선 체제에 가까웠던 독립운동 단체를 빨갱이 집단으로 규정하고 적을 공격하는 표적으로 삼게 만든 것이다. 매국노가 애국자로 둔갑하는 위장술로 반공이념이 이용된 것이다. 친일 행위자들이 어둡던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이념대결을 조장했던 근거는 역사서에 익히 밝혀졌다. 또한, 친일 세력이 반공 이념을 권력 무기로 이용해온 사실은 다 아는 비밀이다.


국제사회에서 미소 냉전 체제가 붕괴된 지 30년이나 지났다. 러시아와 중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시대이니 이념 대결 구도는 무너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세계 질서가 미국의 자본력과 군사력에 의해 재편되고, 중국과 러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과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아쉽게도 남북관계는 이념 대립 구도에서 한걸음도 나아진 게 없다. 분단 이후 지금까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겉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하고 있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통일이 될까 두려워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색깔 공포로 분단의 장벽을 더 높게 쌓으려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한 때 금강산 여행길이 열리고 개성공단 경제 협력 물꼬가 트이더니 그들의 방어벽에 가로막혀 다시 닫힌 상태가 되고 말았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이라면서,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모순된 주장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친일의 독재 권력이 반공을 국시로 내세워 통치하는 시대는 이미 끝이 났다. 그들에 의해 입혀졌던 옷은 기억에서 지워 없애야 한다. 현재는 개성을 살려 마음껏 자신을 뽐내는 시대다. 손주들과 차를 몰고 묘향산에 놀러 가는 날이 오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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