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편이 아닌 사람은 세상에 없다.
'우에 시다리 시닷말이 없어요'는 대전지역에서 손바닥 편 가르기를 할 때 쓰는 구호다. 지역마다 구호는 다르지만 어렸을 때부터 누구나 편을 갈라 노는 문화를 따라서 즐겨왔다. 개별 놀이보다 기마전이나 줄다리기처럼 편을 먹고 하는 놀이가 훨씬 더 재밌다. 개인 달리기보다 청백 계주가 더 스릴 만점이다. 우리 편은 잘하길 응원하면서 다른 편은 실수하길 은근히 기대한다. 편 먹고 하는 놀이의 백미가 아닌가 싶다. '우리'와 '그들'로 구분 짓는 문화는 한국사회의 오랜 전통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편애의 마인드가 오랜 문화에서 길러져 내려온 셈이다.
내편을 편애하고 상대편을 경계하는 심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공동체 삶에서 생존 본능이라 할 수 있다. 생존에 유리하기 위한 성장의 일환이 경쟁인 것이다. 이기려는 욕구에 의해 생존력을 키우고 성장에 도움이 된다. 이기려는 욕구는 경쟁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자 원천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사를 놓고 벌이는 싸움으로 번지면 독이 된다. 이해와 가치 충돌로 인해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현실 사회가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나은 미래를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은 생산적인 일이다. 하지만 상대를 쓰러뜨려고 암투를 벌이는 모습은 안타깝고 불안하기만 하다.
가족이나 지인들 모임에서도 예외가 없다. 정치적 이념이 달라 말다툼을 벌이다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관계마저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서로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데서 발단이 시작된다. 우리 편 주장만 옳고 우리 편 이야기만 반갑게 들린다. 그들 편 논리는 아예 무시하고 듣고 싶지도 않다. 한 때 나 자신이 그런 부류에 속해 있었다. 정치는 일상생활이 직접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 자신도 그런 성향을 갖고 있었다. 어느 편에서 발을 떼고 싶어도 언론과 정치가 나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가정이나 사회 모임마저 정치적 이념 논쟁 공간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편향을 갖기 마련이다. 자기만의 고집이나 고정관념이 이기적 자기 편향이다. 그러한 이기적 편향은 불안하고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가치이자 정체성이기도 하다. 자신의 존재감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보호하려는 자세나 태도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기 편향은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소통과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든 원인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의 이기적 편향은 외부 세계와 관계의 벽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관계의 벽을 허물지 않고 대인관계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관점이나 주장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원활한 관계를 기대할 수 없다.
똑같은 말도 누가 했느냐에 따라 대접이 달라진다. 흔히 말하는 발생적 오류다. 우리 편이 한 말은 선의의 고언인 반면, 상대 편이 한 말은 악의의 모함으로 단정해 버린다. 편 가르기 문화의 기본 문법이다. 편 가르기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편이 갈려도 다수의 의견에 따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편 가르기 기준이 무엇이냐다. 메시지가 아닌 사람을 기준으로 가르는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논지의 타당성을 문제 삼지 않고 사람을 문제 삼는 것이 문제이다. 그럴 경우 상대방의 의견에 조건을 달게 되면 욕설이 되고 만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사회를 파괴하는 주된 요인이다. 자기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공중파를 타고 들려오는 폭언과 욕설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XX나 Blur로 처리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요즘 인터넷이나 Youtube는 여과나 통제가 전혀 없는 자유로운 소통 공간이다. 이념이 갈등에 관한 논쟁을 벌이는 공론장을 벗어났다. 일방적 가짜 뉴스 경연장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혐오를 자극하고 모욕적인 표현은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다. 자기 편향으로 억지 주장을 펴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공갈협박까지 하는 모습은 볼썽사납다. 비신사적이고 비이성적 언행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임에도 광고주가 붙는 것을 보면 의외다.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가 마치 개인의 화풀이나 분노 표출의 권리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개인이 정신세계를 병들고 황폐하면 진단 지성이 망가지는 것은 잠깐이다. 인간관계가 힘없이 붕괴되면 사회는 타락하기 마련이다. 얼굴 없는 만남이 이뤄지는 요즘 시대가 특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상품 거래조차 생산과 소비가 얼굴 없이 거래가 일어나고 있다. 만남이 없는 인간관계는 관계가 없는 것과 같다. 통제 불가능한 익명의 거래가 위험한 까닭이다. 가족이 먹는 밥상에 유해 식품이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다.
신체폭력만 폭력이 아니다. 무력 무기 못지않게 깊은 상처를 주는 것이 언어폭력이다. 익명의 인터넷 숨어 험악한 표현을 퍼붓는 모습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의 모습이다. 눈과 귀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 Youtube셀럽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성의 뇌는 보이질 않고 동물적 감각 언어를 주로 쓰는 모습이다. 상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말, 나쁜 일을 책임 전가하거나 탓하는 말, 상대를 노예처럼 대하는 명령 등 언어폭력에 해당하는 자극적인 말에 난무하고 있다. 언어폭력은 신체적 폭력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으며,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불안이나 공포증처럼 치명적인 결과를 줄 수 있다.
사회는 인간관계가 본질이다. '나'보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는 한국사회는 인간관계가 더욱 중요하다. 사람 사는 세상은 이해와 가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다. 서로가 자신들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경쟁은 어쩔 수 없다. 안보와 사회안전망, 빈부 차이로 인한 경제적 갈등, 세대 차이, 지역 갈등, 성차별 문제 등 모든 사안이 우리가 당면한 숙명적인 과제들이다. 다양한 가치와 기호를 가진 사회 구성원들끼리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다. 우리의 삶과 직결되는 사안들로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는 현안 문제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워낙 복잡하게 이해와 가치 충돌로 얽혀 뚜렷한 해법도 최적해도 없다. 서로 이해와 양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요즘 여야 정치권이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내세워 집권하고자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우리와 그들로 구분하여 민심을 얻기 위해 서로를 향한 공방이 치열하다. 서로가 상대를 경쟁에서 이기려고 비방과 비난만 들려온다. 냉혹한 경쟁사회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기적 편향에 극단적으로 치우친 후보는 자격과 자질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아닌 그들을 무조건 철천지 원수로 규정하지 않으려는 후보가 최소한 지더의 자질이다. 상대에 대한 혐오감을 자극하고 상대를 위협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뜩이나 양극화로 심한 갈등을 앓고 있는 한국사회다. 우리만을 위한 지도자가 되면 우리가 아닌 그들 편 유권자들의 권리가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후보는 도널드 트럼프처럼 선거를 통한 민주절차조차 부정하고 억측을 부릴 게 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편 가르기는 편견과 오해, 균열과 왜곡의 시작점이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차이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는데서 혐오가 시작된다. 나와 다른 차이를 굳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반면교사로 삼으면 된다. 가제는 게 편이라는 말처럼 감정을 지닌 사람은 팔도 안으로 굽는다. 편향된 시각을 지닐 수밖에 없음에도 강박 때문에 가제는 게 편인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우리에게 유리하게 나오면 그건 ‘국민의 위대한 선택’이지만, 불리하게 나오면 그건 ‘반대파의 공작과 음모’ 탓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어떤 지도자도 반대 편의 입장에서는 나라와 사회를 망치는 짓을 하기 마련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최소의 필요악을 선택할 뿐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살아가는 세상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이기적 욕망으로 외부세계와 부딪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가정과 이웃, 직장 등 사회 울타리에서 관계를 맺지 않고 살 수 없다. 외딴곳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든든함이 생긴다. 이념과 성향과 상관없이 동질감을 갖기 마련이다. 해외여행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무척 반갑게 느껴진다. 모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맺어준 동질감이 느껴진다. 내편이 아닌 사람이 세상에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