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물이나 공기와 같은 이유
반석천에 봄기운이 가득하다. 며칠 전에 벚꽃 개나리 축제가 끝나더니, 이제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인적이 뜸하던 천변로가 시민들의 움직임으로 활발해진 모습이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부부들이 많고, 거친 숨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달리는 사람도 있다. 킥보드나 자전거를 타고 봄바람을 가르는 사람도 있고, 반려견을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도 있다. 하나같이 봄기운에 젖어 기분이 좋은 표정을 하고 있다. 생동감이 넘치는 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봄은 찾아온다. 희망을 상징하는 봄은 어김없이 온다. 그럼에도 이번 봄은 더 간절하게 기다려왔다. 지난겨울이 유독 혹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안과 불면에 시달리던 지난한 겨울이었다. 따스한 봄이 되길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참고 기다려왔다. 추위가 지나고 나면 새싹이 돋아나기 마련이고, 겨울잠에서 깨어나면 악몽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희망의 봄을 설레면서 기다렸던 이유다.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고, 새로운 희망이 시작될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면으로 봄은 맞이할 수 있게 됐다. 국회의 비상 게엄 해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 국회와 한남동 관저, 남태령에서 응원봉을 들었던 사람들,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뎌낸 ‘키세스 시위대’들 등이 추운 겨울을 몰아낸 이들이다. 아찔하기만 했던 위험천만 대한민국을 다시 살려낸 사람들이다. 위기의 내란 정국에서 민주주의를 구출해 낸 훌륭한 분들이다. 그들의 외침이나 응원이 없었다면 지금의 봄조차 마주하기 어려웠다. 암울하기만 했던 지난겨울. 광화문과 전국 각지, 온라인 공간에서 힘써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고마움을 전한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처럼 아직도 봄이 봄처럼 느끼진 않는다. 봄이 되면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거라는 상상이나 기대는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헌법이 사회를 지킬 수 있을 거라는 상식조차 의심해야 할 지경이 아닌가 싶다.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내란의 주범들이 스스로 책임을 묻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란 주동자를 헌법재판으로 파면시켰어도 구속 수감조차 하지 못하는 망측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란은 진행 중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만 파면으로 물러났지 그들 세력의 내란은 계속되고 있다. 내란에 찬성하고 지지하는 세력들의 목소리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특권이나 반칙을 저질러 사회를 어지럽히고도 되레 큰소리치는 형국이다. 침묵으로 응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봄이 오길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도 있지만 겨울이 그리운 사람도 적지 않다. 변화가 두려워 과거 향수나 추억에 기대고 싶은 이들이 아닌가 싶다. 특히 반공 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들 중에 그런 이들이 많은 것 같다.
한국 전쟁 직후 태어난 세대들의 특징이다. 반공 이념이나 가치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친일과 친미는 쉽게 수용하는 편이지만 친북에는 치를 떠는 사람들이 많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격동기를 거쳐 험난하게 살아온 이들이다. 생존을 위해 숱한 역경을 이겨낸 세대들 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들 세대는 친일 군사 독재 권력에 부역자나 다름없는 존재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주권자로서 권리 주장이나 자유는 사치로 여기고 살아온 셈이다. 기득권 세력의 지배와 억압에 길들여 생계에 매몰된 삶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재가 탄핵 선고일을 발표한 날. 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 탄핵 선고일이 정해지면 한턱을 쏘기로 공언했기 때문이다. 매운탕 전문점에서 메기 빠가를 넣은 푸짐한 탕을 시켰다. 민물 매운탕은 어죽에 수제비를 넣어 어렸을 때 즐겨 먹던 맛이다. 오랜만에 흙내 나는 매운탕에 옛 추억을 떠올렸다. 또래의 입맛은 서로 비슷했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 대한 이해는 서로 달랐다. 6명이 윤석열 파면을 예상한 반면, 기각에 대한 기대도 3명이나 됐다. 식사 주인공으로 기분을 내고도 탄핵 얘기는 꺼냈다가 중도에 중단하고 말았다.
4.4 탄핵 선고 날이다. 당구장 TV앞에서 11시를 애타게 기다렸다. 당구장 손님은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다. 평소 15~6명이던 손님이 그날은 7~8명 밖에 없었다. 파면 선고를 직감한 탓인지 그들은 평소처럼 큐대를 들고 당구에 몰두하는 모습이었다. 윤석열 탄핵으로 체념한 분위기가 짖게 느껴졌다. 친구와 둘이 긴장하며 TV화면을 끝까지 지켜봤다.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는 주문에 친구와 함께 안도했다. '우~와'하며 함께 탄성을 질렀다. 박수 소리를 듣고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눈빛들이 선하니 어른거린다.
유통 기한이 별로 안 남은 인생이다. 꼭 해야 할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도 별로 없을 만큼 살아온 인생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평온한 삶이 유일한 희망일 따름이다. 정치에 내가 관심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이나 공기가 오염되면 생존이 힘들듯이 정치가 오염되면 삶도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회에서 온전한 삶을 원한다면 정치부터 바로 서야 한다. 특권과 반칙의 내란 세력을 하루빨리 단죄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야 정치가 바로 서 삶이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