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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Sep 16. 2022

선언하고 호명하라!

당신의 이름을.

없던 길을 만드는 사람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무언가를 선언하는 사람들, 발화되지 않은 것을 발화하는 일, 선언하는 행위로써 말해지지 않은 것을 실재하게 하는 일. 누군가는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이라 폄하하겠지만 우리는 안다. 말을 하기 전과 하고 난 후는 분명히 다르다는 걸. 선언하고 호명하면 누군가가 말한다는 걸.(p.96)


<당신을 이어 말한다> 이길보라, 동아시아  

ㅡㅡㅡ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눈길을 끄는 몇몇 의뢰인들이 있었다. 뭐, 모든 회차를 다 챙겨본 것은 아니다. 나는 한 개인의 분투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행복과 힐링이 보장된다는 바람직한 스토리 라인을 극혐한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 책이 재미있거나 인기를 끌었노라는 평에 마음이 슬쩍 동하는 인간미 또한 겸비한 덕분에 나의 문화생활은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하는 중이다.


우영우라는 캐릭터는 위태롭다가도 엉뚱하고 사랑스럽게, 심지어 월등히 특별하게 연출된 비현실 자체다. 물론 배제된 이들을 대변하는 것은 그들과 같은 스펙(?)을 지녀야 가능하다는 작가적 신념일 수도 있다. 극 중 우영우의 장애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자격조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 점 그늘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의 판타지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감동받았다. 약하고 착해빠진 사람이 정당하게 이기는 것을 보고 싶은 대중의 욕구라 치자.


오히려 드라마의 재미는 여러 에피소드의 생활 밀착형 소재에서 드러난다. 드라마 속 재판정의 의뢰인들은 나름의 ‘선언’을 한다. 그들은 성정체성을 밝혔고, 놀 권리를 주장했으며, 편견과 차별에 맞서 삶의 자기 결정권을 주장했다. 장애가 있거나 어리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정해놓은 범주를 함부로 넘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이라 보기 좋게 포장된 ‘보살핌’을 받아왔다. 이는 프라임 타임에, 그것도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그러니 이 지점에 물개 박수를 보낼 수밖에.


보호, 혹은 보살핌이라는 명분은 개인의 자기 결정 의지와 종종 충돌을 일으킨다. 누구에게는 ‘빼앗김’, ‘박탈’, ‘배제’의 상황이 다른 한편에서는 ‘가성비’, ‘실리’, ‘효율’ 더 나아가 ‘사랑’의 논리로 둔갑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의 주인공을 내세워 현실에서 무한 방송 중이다. 그런 기시감 때문에라도 이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스스로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느냐는 물음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나는 우영우가 재판정에서 의뢰인의 이름을 호명하고 그들의 의지를 대리표명하는 것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이름표를 붙여 구체화하는 은유로 보려 한다.


언어화하기 전과 언어화 이후는 엄연히 다를 터. 비록 드라마지만, 그녀의 성공(정규직 전환)은 장애를 희화화했던 그간 코미디 및 예능 프로그램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영우는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에 존재한다. 현실 속 우영우는 20년 동안, 아직도, 매주 달리는 통근 지하철에 올라타 목이 터져라 ‘이동권’을 외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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