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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May 03. 2023

노량진 抒情詩

누군가에게는 약속의 성지였을

봄, 각양각색 꽃이 피는 계절이다. 만성 비염을 달고 다니는 나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시기이기도 하다. 재수시절과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기에는 정기적으로 이비인후과에 들러 항히스타민제를 받고, 가방에는 늘 휴대용 티슈를 넣어 다녔다. 수시로 코를 훌쩍거려서 우느냐는 의심을 사곤 했다.


어찌 입어도 노량진의 새벽, 밤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하지만 바야흐로 봄, 노량진에 본격 5월이 도래하면 지나다니는 고시생들의 트레이닝복에 변화가 생긴다. 두꺼운 기모 트레이닝에서 얇은 폴리 트레이닝으로. 두툼한 맨투맨 후드에서 얇은 라운트 티셔츠로. 그뿐인가. 노량진 고시생들의 가슴에 나풀나풀 봄바람이 일렁인다. 고시촌 너머 사육신묘에는 썸 타는 고시생 남녀가 천 원짜리 길거리 토스트에 컵밥으로 데이트하며 한 끼를 때우고, 인기 강사 직강을 듣는 날이면 일찍 줄을 서서 서로의 자리를 맡아주는 등, 눈을 질끈 감고 싶을 정도로 꼴사나운 애정행각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았거나 알레르기로 괴로울 뿐이었다. 짜면 물(물론 콧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꽃내음 휴대용 티슈’ 한 통에 코를 풀어댄 어느 날, 나는 독서실 옆자리 사람이 보낸 쪽지에 내쫓기듯 커피 믹스를 들고 길거리가 보이는 계단에 앉았다.


 “죄송한데, 감기약을 드시고 독서실에 오시겠어요? 신경이 쓰여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워요”


망할 것들. 노량진 거리를 쏘다니는 이것들은 나랑 상관없이 츄리닝 차림에도 맑고, 밝고 발랄하구나. 코 밑은 헐어서 벌겋고, 얼굴도 팅팅 부은 데다 머리마저 산발인 나는 오도카니 계단에 앉아 소주 따르듯 커피 믹스를 컵에 쭉 따랐다. 편의점에서 파는 고급진 믹스 커피. 한잔에 1,200원. 하루 한 번 나에게 베푸는 사치다. 달달한 맛이 활력을 돋우기엔 딱이지.


봉지를 뜯고, 가루를 탈탈 털어 컵에 담아 제단에 성수 바치듯 정수기 위에 다소곳이 올려 두었다. 휘저을 종이 숟가락을 점선대로 꼭꼭 눌러 접고, 비닐 쓰레기를 모아 버린 뒤 돌아섰는데 어라! 컵이 없다. 옆에서 계단 청소를 하며 쓰레기를 수거하던 청소 아주머니가 번개같이 정수기 위의 컵을, 미처 휘젓지도 못한 내 커피를 낚아채 종량제 봉투로 던졌다. 종이스푼이 허망할 따름이었다. 내 입은 떡 벌어져 소리도 못 지르고, 아줌마도 내 표정을 보며 분위기를 알아챈 듯 이내 동작을 멈췄다.


“학생 미안해. 근데 다시 못 먹을 것 같아. 내 고무장갑이 더러워서...”


그룹 10센티는 <봄이 좋냐>라는 노래에서 꽃이 언제 피는지 그딴 게 뭐가 중요하냐 노래한다. 봄이 그렇게 좋으냐고, 벚꽃이 그렇게도 예쁘냐고.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듯 듣는 이에게 ‘멍청이’라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나에게 봄은 ‘알레르기’, ‘콧물’,  약기운에 멍했던 노량진 고시생 시절이다. 또 어김없이 찾아온 봄, K-94 마스크도 알레르기 재채기를 다 막아주지는 못했다.

올해도 노량진 골목에는 고시생, 공시생으로 북적이겠다. 최근 기사는 노량진 컵밥 거리도 공무원 지원자 수가 줄고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강의를 듣는 수강생이 늘면서 지역 상권이 불황을 겪는 중이라고 전한다. 나에 대한 불신과 불안으로 고통받고 침잠하던 곳, 매일같이 콧물과 알레르기 비염과 사투를 벌이던 곳, 기약 없는 희망을 동아줄 삼아 한 끼 일이천 원의 토스트와 컵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약속’의 성지. 나는 몇 번의 계절을 보내고 서둘러 그곳을 탈출했다. 그리고 한강대교를 건너며 늘 기도한다. 당신들의 봄이 짧고 굵게 지나가길. 그리하여 커피믹스 한 잔으로 뜨거웠을 그날을 추억할 오늘이기를.


*사진은 2004년의 나.

단벌 교복이던 단돈 9만원짜리 애착템 잠바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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