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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Oct 24. 2022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무엇이든 가장 못하니까.

우리의 싸움은 다정해야 한다.

양자경 언니의 점프 버스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어디에서든 한꺼번에(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경험하게 만든다. 마치 우리가 일상을 살아내는 방식과 같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개의 자아가 뒤죽박죽 섞이며 지금 이 순간이 현생인지, 과거인지, 혹은 미래를 당겨온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다니엘스의 이번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는 그런 일상에 이른바 ‘마블’적, 혹은 ‘매트리스’적 상상력을 가미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시공간의 뒤섞임은 서류를 구비해오지 않으면 압류를 걸어버리겠다는 국세청 직원(제이미 리 커티스 분)의 ‘엄포’를 당장 쳐 죽일 듯 뒤쫓는 살벌한 빌런의 눈빛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난장판의 연속, 그 기발함에 의자에서 등을 떼고 볼 수밖에 없었다.


<E-E-A>의 최고의 장점이라면 뻔한 가족서사를 뻔하지 않게 풀어내었다는 데 있다. 사실 뻔하지 않은 가족영화를 본 적이 없다. 가족영화의 특성상 눈물 콧물 짜내가며 뉘우치는 인물과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피해자인양 딱한 표정을 짓는 인물의 등장은 필연. 대환장 파티 이후 온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목놓아 우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서사는 불편하다 못해 뻔했다. 저러다 말겠지, 얼마나 가겠어. 저렇게 울어도 사람 바뀌는 게 아니야, 식의 비관도 한몫했다. 차라리 이 나라의 가부장들이 허락한다면 서슬 퍼런 비수를 던지는 영화 <세 자매>라든가, 백마 탄 왕자 서사에 흠집을 낸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건강한 가족 서사라 부르고 싶은 심정이랄까.


‘지금’이라는 동 시대성으로 수많은 가상의 유니버스를 연결하고 또 다른 세상을 사는 에블린의 능력을 소환하고 인용해 뒤섞고 반죽해서 내보이는 현생의 ‘에블린’, 사실 우린 이런 캐릭터가 무척 익숙하다. 마블이든 DC든 엇비슷한 광배근과 삼두를 자랑하며 무소불위 파워를 자랑하지 않던가. 허나 닥터 스트레인지의 “도르마무”식 멀티버스는 식상한 방식으로 주인공에게 전지전능을 부여하는데 그쳤다면, <E-E-A>의  “점프버스”는 참신하고 세련된 자세로 지금의 삶을 끌어안으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심지어 유머스럽게!!


발버둥 쳐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현실은 ‘부질없음’의 늪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멀티버스적 세계관을 다룬 히어로 영화의 플롯이 단조로움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는 부질없는 현실을 벗어나고픈 현대인의 욕망을 대리 충족시켜주기 때문은 아닐까. 초현실의 존재는 그 어떤 책임과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우니까. <E-E-A>는 다른 방식으로 초현실을 그려낸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이라 말한다. 부질없음과 공허함 가운데 있을지라도 ‘곁’과 손 잡을 때 어떤 것이든 해낼 수 있는 ‘우리’가 된다. 그래서 당장의 나는 가장 최악의 나이지만,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나’라는 영화 속 에블린의 각성, 아니 양자경 언니의 각성은 짜릿했다. 마치 내가 그런 각성에 이른 듯한 착각에 들게 할 만큼. 그런 각성의 여운을 오래도록 즐기기 위해서라도 한동안 나는 베이글을 먹을 것 같다. 언젠가 내게도 개연성 없는 행동이 가져오는 우연의 소산, 또 다른 차원의 나를 만나길 꿈꾸면서.



한나절만에 조회수가 10000회, 다음 메인에 하루 종일 노출되었습니다. 더 열심히 치열하게 글을 써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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