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뛰는 일에 대하여
열정이 가리키는 일, 가슴이 뛰는 일, 보람찬 일을 하려면 그 ‘일’을 찾아나서는게 먼저다. 현대사회에는 넘쳐나는 정보가 있고, 눈에 보이는 생활 전반의 수준도 향상했으니 과거에 비해 보다 많은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듯 보일 때도 있다. 요즘은 일의 경계가 무너져 정의조차 어렵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나만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은근한 불안도 존재한다. 소셜미디어 속 될성부른 떡잎 인생들은 어쩜 그리 많은가. 상대적 박탈감이란 그들의 화려한 인스타 피드에 홀린 영혼을 가리키는 말일 게다.
뒤쳐질까 봐 행여 소외될까 두려워서, 부러운 나머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시작한 일은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이는 다른 이를 끌어와 내 인생 한가운데 세우는 것과 같다. 때로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간절해도,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주인공의 모습은 내면의 결핍과 열등감의 반영이기도 해서 마주하기 두렵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일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눈이 반짝이는 사람들이 부럽다.
박소연의 단편집 <<재능의 불시착>>중 <가슴 뛰는 일을 찾습니다>의 주인공은 “가슴이 뛰는 일을 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보며, 갑자기 가슴이 뛴다는 건 ‘심혈관 질환’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검색창에 ‘가슴이 뛰는 일’을 쳐보면 ‘사명’, ‘신념’, ‘영혼’, ‘동기’와 같은 엄중한 키워드들이 코를 꿰어 줄줄이 올라온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말끔히 제거된 이 단어들은 꽉 막힌 듯 단호해서 언젠가 뇌혈관 질환도 추가로 얻을지 모른다. 대체 언제부터 가슴 두근거리는 신성한 ‘열정’은 우리의 조롱을 받았던 걸까.
‘열정’을 앞세우게 된 것은 억지로 어려움을 참아가며 일을 감내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우리는 단순 반복, 기피 직업, 주체에게 돌아오는 경제적, 정신적 가치가 없거나 낮다고 생각되는 일에 지불하는 대가를 ‘열정 페이’라 일컫는다. 어쩌면 이는 자연스러운 시장경제체제의 귀결이다. 낮은 가격에 일할 사람들은 널려 있으니 자연스레 고용주는 갑이 되고, 흔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는 피고용인은 을이 된다. 저임금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고용주는 슈퍼 갑으로 등극한다. 열정의 배신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꿈꾸고 좋아하는 일은 천직처럼 따로 있고 그 일을 찾으면 성공에 이른다는 통념은 얼마나 순진한가. 열정 없이도 더 나은 커리어를 쌓을 수 있지는 않을까. 언젠가 함께 글을 쓰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열정을 갖고 있는지 적어보자’라는 글감을 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의 상당수가 ‘취미’, ‘소일거리’에 열정을 가졌는데 이게 진로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노라는 자아비판적 성격의 글을 썼다. ‘열정행복론’을 강의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은 수백만 회의 엄청난 조회수를 자랑한다. 이 연설이 열정론에 불을 지핀 셈. 그러나 젊은 시절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영적 여행을 떠났으며 동양 신비주의에 심취했다. 올곧은 열정을 강조한 잡스가 열정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이들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까.
인터뷰 영상 <스티브 잡스: 더 로스트 인터뷰>에서 잡스는 “똑같이 평범한 돌들이 서로 이렇게 부딪히면서 마찰을 만들고 소음을 내다가 그렇게 아름다운 돌이 된 거죠.” 라 말한 바 있다. 나는 오히려 이 말이 회자되었으면 한다. 당장 우리의 행동은 ‘무의미’하지만 상호 연결을 통해 더 커다란 잠재력, ‘유의미성’을 지닌다. 고물가 저성장 시대다. 당장의 전망? 상업성? 좀 떨어지면 어떤가. 미련해 보이는 ‘노오력’도 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매듭임을. 어떤 열정은 생산성과 등가 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인정하자. 시장경제체제의 빈 틈은 경제논리를 벗어날 때라야 보인다. 쓸모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열정’으로 둔갑시키는 과오를 더는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