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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Feb 02. 2023

따로 또 같이

새로운 세상에 발 디딜 당신을 환영합니다.

갤러리 현대에 박민준 전시회를 보러 다녀왔다. 작가의 판타지적 관점, 하이퍼 리얼리즘의 세계관을 반영한 작품을 재미있게 둘러봤다. 전시된 작품은 서커스라는 콘셉트를 차용하여 장면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인간이 아닌 캐릭터에 표정을 부여했고, 이름을 붙여주며 그의 독백을 기록한 작가의 디테일한 작업에 흥미가 갔다. 마치 영화 속 주요 장면을 소개하듯 다가왔달까.


아이들과 이리저리 흩어져 각자 그림을 보았다. 습관처럼 아이들은 마음에 드는 그림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전시장 초입의 파란 옷을 입은 어릿광대와 전시를 다 보고 나면 바로 마주 보이는 붉은 옷을 입은 어릿광대에 시선이 콕 박혔다. 지금부터 시작이니 어느 장면 하나 놓치지 말라고 알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시작과 끝을 경험하며 이야기의 존재를 깨닫는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 책의 표지와 마지막 편집자와 출판사를 소개하는 내지처럼. 어릿광대 그림 앞에서 저절로 준비하는 마음이 되었다.


박민준 작가는 작품 및 캐릭터의 은유와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아예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에 대한 소설을 두 권이나 출간해 버렸다고. 말이라서 쉽다. 캐릭터 하나 만들기도 어려운데 서사와 스토리까지 구성했다니. 작가의 작업량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입구에 비치된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캐릭터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 같아서 새로 한 권을 구입했다. 전시회에서 도록이 아니라 소설을 구입하다니 이 또한 색다른 경험이다. 책 좋아하는 큰애가 냉큼 가져버려서 구경도 못했지만. 아이들이랑 맛있는 점심에 후식까지 챙겨 먹고 나니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은 듯했다.


설 연휴부터 그다음 주 월요일까지, 좀 멀리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이곳저곳 헤집고 다녔다. 애들이 어릴 때는 힘에 부쳤다. 그래도 틈만 나면 가방을 챙겼다. 새로운 곳 혹은 익숙한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우리의 여행은 늘 공부부터 시작했다. 챙겨갈 물건보다 중요한 건 여행할 지역의 위치나 가는 방법, 구경할 만한 지점, 먹어야 하는 음식이다. 여행 책자도 다수 구비해서 아무 때나 펼쳐보도록 여기저기 굴려둔다. 아이들에게 꼭 가고 싶은 곳, 꼭 사고 싶은 물건을 체크하라는 당부와 함께. 나만의 여행 계획은 오프닝 크레디트를 마주하는 것 같은 기대감이 되곤 하니까.


상세한 공부는 현지인의 방식으로 여행을 즐기게 만든다. 이는 숱한 실패를 전제한다. 하루 10킬로 이상, 약 2만 보 정도의 발품을 팔아야 가능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여행지에서는 느긋한 마음을 먹는 게 중요하다. 또 초등 저학년 아이일지라도 낯선 곳에서는 얼마든지 어른과 비슷한 크기의 발언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해야 하는 일 앞에서 연령의 높낮이나 경험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아이스크림으로 대충 입을 막아버리는 방식보다, 유명 관광지의 팻말처럼 서있는 것보다 주변 풍경과 생동감 있게 어우러지도록. 그제야 비로소 한 블록 더 멀리 보고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여행이다.


 아이들이 제 한 몸 간수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지난했던 판데믹도 아이의 성장을 막지는 못했다. 어느새 나를 리드했고, 오작동하는 내 방향 감각을 타박했다. 괘씸하고 분했다가도 한편으로는 어딜 데려다 놓아도 이 아이들은 잘 먹을 것이고, 충분히 즐길 거라 생각했다. 더불어 몸으로부터의 거리두기, 정서적 거리 두기는 결코 관계의 멀어짐이 아니라는 깨달음도. 엔딩 크레딧의 끄트머리에 이르더라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 법이다. 좀 더 기다리면 다른 이야기가 비집고 나와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니까. 함께 또는 각자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새롭게 시작됨을 알리는 예고편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쭉 열심히 벌어야 하는 이유, 건강한 몸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다. 이들과 오래도록 즐기는 인생을 살아야지.


따로 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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