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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Feb 14. 2023

6. 미루기의 굴레를 벗어나려면?

‘멀티 마감’의 업보를 견뎌보자.

하얀 바탕에 깜박이는 커서.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째려본 지 수분째다. 노려보고 나면 글감이 덜덜 떨며 기어 나오지 않을까, 머리칼을 뜯으면 순무 뽑히듯 글감도 쑥 뽑히지 않을까 오늘도 텅 빈 머리를 부여잡는다. 해가 중천이라면 신발을 꿰어 신고 바깥에 나가 중얼거리며 걷기라도 하겠지만 밤에는 이마저도 마뜩잖다. 관심 가는 기사나 칼럼 링크를 정리해 둔 곳간을 처음부터 쭉 살펴보기도 하고 책상 주변에 쌓아둔 책을 뒤적인다. 이미 읽은 책은 큰 책장에 꽂아두고, 발제가 필요한 책이나 앞부분만 조금씩 들춰본 책들은 다시 재정비. 글감이 나올 때까지 이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마감이라는 마법이 가져다준 고도의 집중력 덕분에 미션 하나를 운 좋게 수행하고 허리스트레칭을 하며 바라본 책상은 난장판. 신의 권위에 저항하는 바벨탑이 이런 모습일까. 여기저기 책무더기가 탑을 이루고 있다. 책탑은 노트북이 놓일 정도의 공간만 남겨두고 조금씩 모서리로 밀어둔 모양새로 정밀하게 계산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며칠 뒤 다시 이 과정이 반복될 테니 지금 허물어뜨리는 건 의미가 없겠지. 글 권태기, 소위 글태기를 겪어본 이라면 한 번쯤 거쳤을 과정이 아닐까. 뚜렷한 목표 없이 혼자 편수를 쌓는데 의미를 두다 보면 ‘마감’의 힘을 빌리기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매일 뜨는 해처럼 아침은 늘 찾아온다. 정신이 맑을 때 미리 해두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미룰 때 시간은 왜 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게으른데 잘하고는 싶고, 남들 눈치챌 만한 빈틈이 하나 보일라치면 그날은 이불킥을 하느라 잠을 설친다. 미루기의 굴레를 벗어나기도, 대범해지기도 어려운 게으른 완벽주의자에게도 어쩌다 ‘마감’이 닥친다. 한두 가지 일도 가능할 때까지 미루다 보면 여러 마감을 한꺼번에 처리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미루기’의 윤회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멀티 마감’이라는 업보를 치러야 하는 것.


게으른 완벽주의자, 너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하나는 아직 늦지 않았노라 가슴으로 외치며 다시 시작하기 또 하나는 핑계 없는 무덤을 파고 배 째라 드러눕기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지 않다면 꾸역꾸역 제 수명을 갉아먹으며 급한 마감부터 하나씩 처리하는 수밖에. 이내 내 몸을 돌보지 않았다는 죄의식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이 무슨 장발장 방귀 뀌는 소리람.


매일 내리 썼던 경험을 되짚어보면 글쓰기란 특별한 이벤트 여부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었다. 스치는 시간 속 ‘찰나’와 찰나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감’은 나 잡아보란 듯 기다려주지 않았다. 어디 지나가기만 해 봐라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갖춰두고 드잡이 해보려 애도 썼다. 글감을 찾아 뒤집고, 엎기도 여러 번. 이력이 난 걸까. 이제는 마감 시간이 주는 심장 쫄깃한 긴장감을 즐기고 있다. 그뿐인가. 함께 쓰고 읽어주는 동료의 존재, 거기에 스치듯 지나가는 조각난 기억과 꼬리를 무는 생각, 결을 이루어 쌓이는 꽤 괜찮은 나만의 이유가 기껍다. 내 ‘글쓰기’의 원동력이다.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짤막한 글을 나누는 것은 상황에 짓눌리지 않으려는 노력일 게다. 우리는 일상의 부침에 똑같이 괴롭고 온라인 너머 데칼코마니 같은 모습에 손뼉 치며 공감한다. 단지 개인차가 존재한다면 근육의 차이가 아닐까. 넘어져도 금세 일어서는 근육, 오래 달리게 하는 근육, 버티는 근육과 같은 것들 말이다. 거창하지 않은 소소한 근육은 쉽게 포기하는 깃털 같은 존재에게 무척 중요하다. 이는 지치지 않는 근성을 키워주니까. 오늘 분량의 죄의식을 폼롤러로 달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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