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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잍 May 04. 2023

9. 어떤 실패는 필연적인 성공으로 이어질 거라 믿기

털어내고 닦아내도

학교 다니며 과외를 꽤 오래, 많이 했다. 대학생인지, 고학생인지 자주 헷갈렸다. 의뢰받은 집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자마자 그 집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멋진 인테리어에 샤라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내며 등장해 염탐하듯 현란한 간식을 차려 들이미는 집보다 맹물만 있어도 도란도란 스몰톡이 오가는 분위기에서 일할 맛이 났다. 이 집에서 저 집을 오가며 빵이나 캔커피로, 준비해 주는 간식으로 끼니를 때웠다.


은영이는 중학교 내내 미술을 하다가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엄마와 은영이, 언니, 셋이 살았다. 은영이 엄마가 운영하는 어둑한 노래방에서 노래책 위에 캔콜라 하나 올려두고 과외 면접을 했다. 제대로 된 수학공부를 해본 적 없다는 은영이는 초등학교 때 썼던 칸 넓은 공책에 문제를 풀었다. 가끔 공책 여백에 낙서가 보였는데, 유치하다며 킥킥 둘이 머리 맞대고 웃고 나면 텅 빈 집안 공기가 가볍게 들뜨곤 했다.


“샘이랑 오래 공부할 형편은 안되고요. 딱 6개월만, 1학년 수학을 끝내주시면 좋겠어요.“  


사실 무리였다. 중학 기초가 없는데 주 2회 과외에 6개월 동안 고등 1년 과정을 마스터해 달라니. 다음 과외처로 이동할 동선도 꼬이고 지하철역에서도 멀었다. 안 할 이유를 꼽으라면 열손가락을 다 접겠지만, 마음을 고쳐먹은 건 아이가 문제풀이 공책에 열심히 지우개질을 했기 때문이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두 줄 북북 긋고 말았을 잘못된 풀이. 은영이는 잘못 풀은 부분을 지우개로 깨끗하게 지웠다. 그 위에 다시 풀이과정을 꼼꼼히 적었다.


“엄마가 웬 궁상이냐 그래요. 저는 초등 때 썼던 공책을 다 갖고 있거든요. 그때 나름 열심히 공부했어요. 열심히 했던 기억을 이어 붙여보는 거예요. “


당시 나는 지극히 시험 결과에 연연하고,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는 똑 부러진 과외 교사였다. 하지만 상 위에 초등 수학공책을 펼쳐두고 열심히 하고 싶다 말하는 은영이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은영이는 마음먹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아이의 애씀을 지켜보고 싶었다. 우리의 열심이 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실패들은 필연적인 성공으로 이어질 거라고 믿고 싶었다.


은영이네 문턱이 닳도록 전농동을 드나들었다. 과외하는 날에는 개다리소반을 놓고 나란히 앉아서 내가 준비해 간 빵을 먹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흔적 없는 곳. 이따금 근처를 지날 때마다 은영이 얼굴이 떠오른다. 기적 아니 예정된 것처럼 6개월 만에 은영이는 바라는 범위를 끝마쳤다. 마지막 과외날, 은영이는 운동화를 고쳐 신는 나를 배웅해 주겠다고 버스정류장까지 나왔다.


“언니 필요하면 또 연락해.”


엊그제 중간고사를 치른 아이들의 책상을 정리했다. 털어내고 닦아내도 어딘가에서 지우개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어젯밤의 ‘열심’이려니. 그래. 세상에는 열심을 기해야 하는 일이 지우개 가루만큼 많지. 지우개 가루로 화(和)했을 아이의 글씨를, 그날의 수학 공책을 떠올렸다. 간밤의 애씀을 어루만지듯 분분히 날리는 가루를 물티슈로 모았다. 지우개 가루라는 단서 덕에 그날의 기억이 온전한 형체를 갖췄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은영이는 꾹꾹 눌러쓴 결심이 사라져 버리는 걸 봤을지 모르겠다. 허나 그 위에 네가 덧대어 쓰는 글이 바로 가야 할 길이며, 해답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 언제 어디에 있건 포기하지 말기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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