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 척 쌍따봉으로부터.
이따금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묻는다. 어디까지 나를 열어 보여야 하느냐고. 시민대학에서 편성준 작가의 에세이 수업을 수강하는 중인데 그곳에서도 여지없이 같은 질문이 나왔다. 토론 논제를 만드는 시간에도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읽고 쓰는 행위 앞에서 사람들은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나는 독자가 솔직함을 바라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아무리 실화라고 강조해도 특정 시기에 존재하던 그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느냐며. 그러니 우리가 매만지는건 크고 작은 사각형의 공간 속 가공된 진실이라고. ‘순도 100%’란 오렌지주스에나 붙는 수식어일 뿐이다.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솔직’은 어떠한가. 엄연히 폭력이다. 노출과 배설 어딘가에 있으므로.
글을 쓰다 보면 ‘솔직하고 재미있게’ 쓰려는 욕심 앞에서 이중고를 겪게 된다. 2018년 12월,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을 읽고 인생 첫 서평을 썼다. 책 읽느라 사흘, 글로 정리하느라 꼬박 사흘. 하지만 장장 A4 4장에 빼곡한 내 글은 감상도 해석도 아닌 허세 가득한, 재미없는 글덩어리였다. 다른 분들의 글에 비해 내 것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깨달았다. 합평 자료집을 집에 가져와 밤새 읽으며 한없이 작아졌다. 그로부터 많은 밤 스스로를 다그치며 낱낱이 돌아봤다. 지금? 여전히 답은 요원하다.
같이 공부하는 분들은 선의를 담아 정성스럽게 피드백을 해주셨다. 그렇게 다음, 또 다음 글을 쌓았다. 내쳐지기 싫은 마음에 질질 끌려가던 글쓰기가 주변의 지지 덕분에 자리를 잡았다. 남의 글을 보는 눈도 덩달아 밝아졌다. 밥 짓고 애 키우던 내게 ‘저녁이 있는 삶’이 허락되다니, 감사했다.
함께 글 쓰는 동료의 어깨 토닥임, 또는 기꺼이 눌러주는 ’ 좋아요’, 나는 이를 ’지지’라 부른다. 꾸준한 지속은 지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왼손인지 오른손인지 구분도 안 되는 엄지 척 따봉에 불과하지만, 글쓴이가 살아내고 버틴 시간에 대한 격려다. 사람들과 글로 소통해 본 경험은 다음 글을 구상하고 어떻게든 나를 표현하게 돕는다. ’솔직‘과 ‘재미’의 정도도 내 글을 써서 보여줄 때라야 비로소 가늠할 수 있다. 그러니 늘 ‘쓰는 일’이 먼저다.
글방 수업에 새로 한 분이 오셨다.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그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수업 당일 책방 문을 들어서는 모습이 참 고왔다. 반짝이는 저 모습 뒤에는 드러내지 않은 발버둥이 있겠지. 그러니 더 얼굴이 빛날 수밖에. 어디에서 이런 열심을 만나겠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던지듯 넘기고 숨 돌릴 틈 없이 돌아섰던 예전 내 모습도 떠올랐다. 부디 보람찬 시간이었으면. 그의 결심이 당장의 배움에 머무르지 않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기꺼이 엄지 척! 응원을 보내는 여유로 이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