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제보다, 내일은 오늘보다
매주 화요일은 글방 수업이 있다. 수업을 마치면 그 주 주말까지 과제를 마감한다. 참여자들이 완성한 글을 다음 시간에 합평하고, 상호 피드백, 약간의 잔소리를 나누면 수업이 끝난다. 엊그제까지 대부분의 마감과 토론이 몰려있는 주말과 월말을 보냈다. 7월의 첫 주의 책방은 비 소식에 제법 한산했다. 여느 화요일처럼 나는 책방으로 향하며 글쓰기 수업의 방향을 고민한다. 수업의 질과 의미, 둘을 함께 챙기는 게 글방 수업의 일관된 목표에 대해. 깜냥도 안되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욕심을 부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꾸 욕심이 생긴다.
어떤 수업으로 발전시켜 나갈지 함께 고민했으면 싶었다. 결석한 분들이 있어서 살짝 김샜지만. 나도, 그들도 항상성을 유지할 수는 없을 테다. 지금까지 꾸준히 수업을 이어올 수 있었던건 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 덕이다. 그들에게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한계와 마주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지는 듯하다. 천천히 쌓아 올려 튼튼해지는 관계가 되어야지. 이렇게 결심할 때마다 더 열중하게 된다. 나가떨어지더라도 열심이었던 시간만큼은 부끄럽지 않을 테니까.
글을 쓰는 건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행위다. 내 글은 독자에게, 동료에게 색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함께 쓰고 합평하는 자리는 내 글에 대한 피드백을 듣는 기회이자 동시에 좋은 글에 대한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서로 합평하며 우리는 내 글과 동료의 글을 비교한다. 상호 피드백을 통해 동료의 글에 대해 말하는 것 같지만, 실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 당부를 건네는 것과 같다. 서로의 글을 섬세하게, 예리하게, 정직하고 깐깐하게 피드백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명징한 피드백의 언어가 쌓일 때 내 글을 보는 눈도 정확해진다
많은 글쓰기 책에 ‘사실적인 글’이라거나 ‘정확한 표현’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글이나 사진, 그림에서 ’사실적‘이라거나 ’정확한‘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대상을 앞에 놓고 쓰고, 찍고, 그려낸 결과물은 다 다르다. 표현력의 차이 이전에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의 사고방식, 취향 등 수없이 많은 요인이 사물을 보는 방식과 습관에 영향을 미친다. 누구든 스스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부분, 각자의 렌즈를 통해 사물을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종종 글쓰기를 사진을 찍는 일에 비유한다. 사진은 늘 같은 자리에 펼쳐진 하늘, 엇비슷하게 다른 방향에서 일어나고 눕는 빛을 활용해 피사체를 담는 작업이다. 피사체는 저마다 가장 아름답게 연출되는 각도를 지니게 마련. 찍는 이의 눈높이에만 맞춘 사진은 감동이 덜하다. 예사로운 아름다움은 피사체를 향해 기꺼이 무릎을 꿇는 사람에게만 찰나를 허락한다. 그러니 사진을 찍으려거든, 글을 쓰려거든 무릎에 흙 묻히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
글을 쓰며 우리는 기억을 재구성한다. 기억은 나를 나답게 만들고 나의 지금을 설명한다. 자연스레 기억의 처음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못난 모습, 아픈 상처를 마주하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분명 계절꽃에 대한 글을 썼는데, 작별인사를 못한 돌아가신 할머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를 글에 담고 있었다. 사실 후련함보다는 아픈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오래 마음속을 맴돌던 이야기에 스스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글쓰기라서 가능했다.
우리는 언제까지, 과연 어디까지 글로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글쓰기를 다른 말로 ‘용기’라 부르는 걸까. 독자는 글쓴이가 끼니를 챙기는 모습만 읽겠지만, 정작 당사자는 그 대목에서 짜디짠 눈물에 찬밥을 말아 후루룩 마셨을지 모른다. 글쓰기 수업은 글쓴이의 악전고투를 지켜주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맵싸하고, 웃기고, 찡하고, 서글프고 달큰한 우리 일상을 모아야지. ‘용기’와 ‘눈물’이 온전히 존중받는 이 공간.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쓰는 오늘의 글은 어제의 글보다, 내일의 글은 오늘의 글보다 의미를 더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