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의 취향이 이어지는 곳.
막내아이의 방에는 커다란 책장이 나란히 두 개 놓여있다. 그중 왼쪽 책장에는 약 8년어치의 먼지와 손때로 빛이 바래고, 습기에 얼룩진 책들이 어른의 눈높이에 나란히 혹은 키 맞춰 두 겹, 세 겹으로 꽂혀있다. 육아서와 심리학, 아이들 독서법에 대한 책이 대부분인데, 육아라는 장벽, 우울이라는 터널을 돌파하도록 도와준 책들이라 애착이 간다. 오른쪽에는 치열했던 읽고 쓰기의 과정을 함께 버텨준 인문학 서적들이 테트리스 블록처럼 빈틈없이 빽빽하게 책장을 메꾸고 있다.
나는 읽는 사람이다. 말보다는 글이 편하고, 구어체보다 문어체가 익숙하다. 아이를 기르며 긴 호흡으로 책을 읽고 곱씹는 건 시간과의 싸움이다. 허나 엄마의 시간이란 나 아닌 존재를 위해 툭툭 끊어내 쥐어줘야 하는 속성을 지녔다. 그래서 이 책 저 책에 갈피를 꽂았다. 한 줄도 읽지 못하고 넘어가는 날, 어떤 식으로든 문장 앞에 머무르는 이정표가 되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의지와 달리 흘러갈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문에 자물쇠를 채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당시 내게 사적이면서 비밀스러운 물리적 공간은 화장실이었다. 어떤 모임에서 오롯한 나만의 공간을 소개해달라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화장실이요.”라 말한 적도 있다. 화장실 문 하나면 세상의 소음에서 해방되었다. 허락된 시간은 5분 남짓, 아이들이 밖에서 주먹으로 콩콩 두들겨댈 테니 오래 머물기란 불가능했다. 건강에도 유익할 리 없다. 그러니 잠을 줄일 수밖에. 모두 잠든 밤 신혼살림으로 들였던 2인용 식탁에 앉았다. 가족을 먹이는 장소이자 나를 위한 채움의 공간, 가로 80센티, 세로 60센티의 반듯한 네모. 딱 그만큼이면 충분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풀어내고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만든 대부분의 독서가 부엌 식탁에서 이루어졌다.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방’,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구는 아이들의 성장에 맞춰 커졌다. 코로나로 아이들의 온라인 수업이 본격화되며 욕구는 욕망으로, 구체적 실행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 독서모임과 토론이 있었다. 읽고 쓰는 이가 밟는 자연스러운 수순인지도. 평소에는 나누지 못할 이야기,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기 딱 좋을 이야기가 문장과 맥락을 타고 책과 일상을 넘나들었다. 물리적 공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누군가의 말에 내 말을 얹고, 쭈뼛거리며 내민 내 글에 상대의 글이 포개어지며 형체 없던 내 이야기가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너와 나의 이야기가 머무는 곳, 자기만의 공간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취미와 취향을 나누는 소모임이 활성화되는 요즘이다. 나는 독서모임을 진행하는 프리랜서 강사다. 모임을 진행하고 강의료를 받아 다시 책을 사고, 다음 강의를 기획한다. 혹자는 책을 읽지 않는 시대, 도서관에 들르면 무료로 진행되는 모임이 즐비한데, 유료 독서 모임을 누가 찾겠느냐, 독서모임의 경제성이나 전망이 좋을 리 없다며 걱정 반, 오지랖 반 섞인 말을 보태곤 한다. 어느 정도는 맞고, 일정 부분은 틀렸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혼자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모임을 진행하건, 참여하건 간에 독서 모임은 어렵고, 번거로운 수고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현재의 독서모임은 단순한 독후 감상의 공유에 그치지 않고 ‘지식’과 ‘문화’의 혜택을 제공하는 공간이자, 성장의 장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서울형 책방의 지원으로 6월 28일부터 7월 26일까지 혜화동 동네 책방 <소원책담>에서 책방지기 재호샘과 ‘책잇는 모임’을 열었다. 번잡함에서 잠시 벗어나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들이 모였다. 저마다의 공간을 가꿔나가는 이에게는 늘 훔치고 싶은, 자꾸 흘끔거리게 만드는 한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이들과 함께 서로의 취향을 살피고, 맞춤책을 추천해 어떻게 읽었는지 각자의 경험을 나누었다. 참여자들은 ‘책’이라는 다리를 통해 자신과 타인의 취향을 오고 갔다. 그 과정에서 추천책 이외에 언급된 책만 해도 십수 권, 각자의 전전긍긍과 전심전력의 스토리가 3일간 펼쳐졌다.
‘함께’의 힘으로 버거운 책의 바다를 건넜다면 이제 마주 앉은 이의 마음의 바다를 건널 차례. 내가 읽은 책을 소개했을 뿐인데 각자의 경험치 안에서만 사고하던 우리가 어느새 옆에 앉은 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책방이라는 공간이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독서 모임이라는 정서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나란히 앉은 이와 의견이 달라 등 돌리기보다 ‘다름’의 크기만큼 내 시야가 넓어짐에 감사할 줄 아는 것. 어느새 다름과 이해가 맞닿는 지점에 우리의 삶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독서 모임에서, 동네 책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어떻게 책과 사람을 이어가는지 궁금하다면, 지도앱을 열어 가까운 ‘동네책방’을 검색해 보시길. 이제 동네책방은 책만 파는 곳이라기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어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취향을 선물하는 공간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많은 이들이 책방에 북적이고 누적된 각자의 이야기가 유익한 콘텐츠가 될 때 책은, 독서 모임은, 그리고 책방은 사람과 사람, 이야기와 이야기를 잇는 매개가 된다. 그리고 독서 모임에 참여한 당신은 책과 타인에게 그리고 ‘삶’을 향해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르포]"일상 속 '쉼표' 같아요" '사랑방' 역할 톡톡…'동네책방' 인기 - 아시아경제 (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