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을 풍덩 담그는 이의 것
토론을 시작하기 전 “저는 토론에 참여하기보다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한 발짝 물러서는 분들을 많이 만난다. 그때마다 “들으러 오셨다는 분 치고 말씀 적게 하고 가시는 분을 못 보았답니다.”라 대답한다. 누구나 경험 여부, 내성적이거나 목소리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 주인공이고픈 순간이 있게 마련이니까. 무엇보다 내 시간을 값지게 쓰고 싶으니까. 이런 분들을 만날때마다 자연스레 책과 글을 나누는 중재자인 내 역할을 고민하게 된다.
관심 없는 척, 얌전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나를 가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면 당황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은 사람과 사람 사이, 허공이다. 낯가리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부끄러운 마음을, 익숙하지 않아 삐걱댈 온몸을 여러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척 연기를 하고 타인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 스치는 눈빛을 읽으려 애쓴다. 이런 내게 지난 코로나 3년은 힘든 기간이었다. 마스크를 쓴 채 미동 없이 앉은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분위기를 띄워야 할까. 부담스럽지 않은 추임새로 뭇 사람들의 시선을 어찌 모아야 하나 고민이었다. 덕분에 낯설음의 극복은 후순위로 미뤄졌다. 수업을 마치고 나면 완전히 퍼지기 일쑤였고.
얼마 전 모처에서 만난 지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때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00명가량 모인 대형강의에서 등 떠밀려 마이크를 잡았던 옛 기억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공포라 말했다. 하지만 내가 권했던 몇 번의 토론을 경험하고 보니 함께 책 읽는 분들의 따뜻한 시선과 격려가 무척 힘이 되었다고. 다음이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힘을 더 낼 수 있겠노라 덧붙였다. 왜 모르겠는가. 한번 바닥으로 떨궈진 시선은 정면을 향하기 어렵다는 걸. 내 목소리 떨림을 인지하는 순간의 오소소 일어서는 소름과 또르르 흐르는 땀방울의 느낌을. 하지만 나에게 온전히 주어진 시간을 책임질 수 있는 건 오직 나라는 사실도 잘 안다.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이야말로 어려운 상황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
크고 작은 모임의 운영 경험이 쌓이며 안정적인 모임을 열고 싶은 갈증이 커졌다. 모든 토론이 내 마음대로 흘러가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매번 인상적인 발언과 명언이 쏟아지는 토론을 기대하는 것 또한 진행자만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모임을 열고 싶은 절박한 마음을 극복하고 나면 어찌 풀어갈지 간절한 고민이 이어진다. 방법이라면 토론에 참여하는 이들과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늘 그랬듯 모임은 참여하는 분들의 역할과 관심이 팔 할을 차지하므로. 낯선 상황에 적응하는 내 개인적 사정은 또다시 후순위로 밀려난다.
모임을 진행하기 위해 해질녁 어스름에 책상 주변에 둘러앉을 때면 책 모임에 참여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서로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줄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감내할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앉아 ‘시간’과 ‘의미’를 보태는 방식으로 서로를 돕는다. 타인의 눈에 비추어진 나를 보지 못한다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본 모습을 영영 알 수 없다. 혼자 성찰하는 시간만으로 나를 파악하기란 역부족이다. 책과 글로 나를 만나는 시간은 다소 품이 들더라도 타인의 시선에 투영된 나를 읽는 과정이라 의미가 있다.
그러니 섣부른 시작이 두려워도 망설이기보다 눈을 질끈 감고 풍덩 뛰어들어야 한다. 온몸을 적시고 나면 낯섦의 극복이나 두려움, 걱정은 다음 일이 될 테니까. 진정 우리가 당도해야 하는 곳은 책이 아니라 책이 가리키는 너머다. 돌고 돌아 ‘책’에 이르게 되었다면 이제 책 너머로 건너갈 방도를 고민할 차례다. 내 앞에 놓인 책, 각자의 논제에 몰두하는 이 순간, 우리는 ‘갑’의 인생을 살게된다. 우리를 살아내게 만드는 동력은 거창한 성공 경험이 아니라 ‘도저히 안 될 상황’을 비집고 들어선 ‘시작의 설렘’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