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다담

독한년 선언

by 플랫화잍

“언니가 내 대변인이라도 돼? 이런 도움 필요 없으니 언니 애들이나 신경 써.”

5학년 큰아이의 공개수업 날 나는 가차 없이 그를 향해 쏘아붙이고 등을 돌렸다. 그이는 나처럼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였다. 초보 강사 시절,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수업 의뢰가 한 건 들어왔는데, 공교롭게 큰아이 학교 행사와 시간이 겹친 게 문제였다. 아이 셋, 학부모 총회와 공개 수업은 모두 3월 셋째 주 혹은 넷째 주에 몰려 있었다. 내 몸은 하나였으니 선택해야 했다.


결국 그 해엔 학부모 공개 수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아이 담임 선생님께 회신했다. 아이에게 미리 양해도 구했다. 그런데 큰아이와 3년 내내 같은 유치원을 다닌 친구의 엄마였던 그이는 다른 반인데도 불구하고 내 아이의 교실에 일부러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엄마가 오지 않아서 시무룩했는데, 들어가서 사진 찍어주니 얼굴이 활짝 피더라.’라는 문자와 함께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 게다. 터울이 같은 다둥이 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내 상황을 잘 알 테고 돕고 싶은 마음이었다는 건 십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아이 학급까지 일부러 찾아가 수업하는 아이에게 손짓하고, ‘브이’를 해 보이는 아이 모습을 찍어 메시지를 보낸 건, 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버려. 너도 애들 맡기면 편하잖아. 본인이 좋아서 저러는 걸 뭐. 너도 참 유난이다.” 그날 이후 데면데면한 우리를 본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 덕에 만난 동네 친구들은 참 다양했다. 나이는 물론이고, 살아온 환경이나 정치적 성향, 경제적 여건 등 아무리 따져봐도 나와 비슷한 점을 찾기 힘들었다. 그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아이 때문이었다. 만나서 나누는 이야기는 ‘아이 발달’, ‘아이 교육’, ‘아이 간식’, ‘아이 선생님’ 등, 온통 아이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성인과 제대로 된 대화 한마디가 간절했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 내 생활에 들어온다는 데 설렜다. 하지만 그들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과 같은 가치관에 내 손을 들어달라 요구할 때면 불편했다.


하원 버스 시간에 못 맞춰 갈 것 같으니 아이를 데리고 있어 달라는 요청은 흔했다. 같이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엄마에게 급한 일이 생겼고, 아이는 공연을 너무 보고 싶어 하므로 내 아이도 같이 데리고 다녀와 달라는 부탁, 어느 학원을 다 같이 다니는데 내 아이만 빠져서 서운할 것 같으니 애 기죽이지 말고 같이 등록하자는 권유, 엄마들의 소소한 브런치 모임과 학급 학부모회장 엄마 주도로 열리는 반 단합대회까지. 이들과의 약속은 처음부터 몇 시부터 몇 시까지라는 경계가 없었다. 아이가 들고나는 시간이 만나는 시간이자 모임을 파하는 시간이었다. 공원에 둘러앉을 때면 놀던 애들이 뛰어와서 새끼 제비처럼 어깨너머로 음식을 한 입 받아먹고, 다시 놀기에 여념 없었다. 나는 아이가 헤집어 놓은 음식을 깨작이다가 앞에 놓인 음료수 잔에 벌레와 먼지가 하나둘 떠다니기 시작하면 집에 가기 싫다고 드러눕는 아이를 한쪽 어깨에 메고 반대쪽 뒤통수에 모두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느끼며 제일 먼저 일어나곤 했다.


선한 마음을 가장한 그들의 충고는 외모를 가꾸는 것부터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것까지 경계가 느슨해지는 틈새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가부장적 잣대로 평가하고 단죄하는 방식은 주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권위와 도덕, 혹은 선한 의도라는 외피를 입고 가해지는 사회적 압박은 특정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을 비난의 제물로 만들어 버리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자기 은근 독하더라. 애들이 그렇게 졸라대는데 눈 하나 꿈쩍 안 해.” 단순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독하다’는 평가는 종종 경계를 지키려는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일종의 낙인과 같다. ‘좋은 엄마’는 타인의 요청을 기꺼이 수용하고 아이들 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희생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스스로 우선순위를 지키기 위해 때로는 거절하고, 자신과 아이를 위해 불필요한 관습을 따르지 않으려는 행동은 금세 ‘냉정함’이나 ‘이기심’으로 해석되곤 했다.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육아 모임에서도 ‘독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피하려면 늘 남들이 원하는 방식에 부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경계 없는 요구들 속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독함’을 선택한 것은 사실 타인과 나,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었다. 육아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형성된 사회생활은 직장 내 관계 못지않게 치열했고, 그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크고 작은 거절들은, 누군가에게는 독함으로 다가갔을지 모르나, 결국 내게는 지켜내야 할 존엄이었다. 『진정한 장소』의 작가 아니 에르노는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닫기에 “구해야 할 것을 선택하는 것”(p.99)이 중요하다고. 삶은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요청과 기대 속에서 무엇을 구할지, 무엇을 포기할지 선택하는 일이 아닐까. '독하다'는 말은 곧 내가 내 삶을 지켜냈다는 증거이자 타협하지 않는 나 스스로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나는 좀 더 치열하게 독한년이 되기를 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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