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하버드 교수의 인터뷰 중 -
“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요?”
이렇게 묻는다면, 대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돈보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이 ‘무엇을 위해’ 일하느냐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돈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성취와 번영에서 옵니다.
무언가를 만들고, 키워내며,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
그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과 사람을 돕는 기쁨이야말로 진짜 보상입니다.
하지만 그 야망이 단지 ‘개인 비행기’를 갖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번영이 아니라 공허한 욕망에 불과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1265년 『신학대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인생에서 쫓는 네 가지 우상이 있다. 돈, 권력, 쾌락, 명예(여기서 말하는 '명예'는 사회적 지위). 그러나 이 네 가지는 절대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야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삶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해 줄 네 가지 가치입니다.
믿음, 가족, 우정, 일(본인의 노력으로 성공을 얻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
여기서 믿음은 종교적 믿음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삶의 철학, 즉 나를 넘어서는 더 큰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이 네 가지를 삶의 중심에 둘 때, 세상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극심한 빈곤의 고통에서 구해낼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무엇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가에 대해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행복은 단순한 물질의 축적이 아닙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성취를 이루고, 인생이 하나의 창업 같은 모험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행복을 경험합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스타트업입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스타트업처럼 바라볼 수 있는 주도권을 빼앗겨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빈곤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야 합니다. 더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존엄의 핵심입니다.
존엄이란, ‘존중받을 만한 가치’입니다.
서구 사회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등한 존엄을 갖는다고 믿습니다. 이 사고방식은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관점에 기반합니다.
당신이 무신론자라 해도, 이 철학의 영향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고는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믿음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신은 존경받는 존재이며, 그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만한 가치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존엄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타인보다 덜 존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이 믿음을 공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구 사회는 이 가치를 근본적인 가치로 삼아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가치관이,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종교적 관점이 어떠하든, 이 진리는 누구에게나 마음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통찰입니다.
그렇다면 존엄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절망입니다.
'우리 사회는 정말 가난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
우리의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할 자산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부채처럼 여긴다는 점입니다.
사업에는 부채도 있고 자산도 있습니다.
부채는 관리하면서 장부에서 없애버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자산은 때때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비용과 손해를 수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산을 발전시키는 이유는 사회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자산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기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부채처럼 대할 수 있고 자산처럼 대할 수 있지만, 우리는 아이들을 언제나 자산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존엄을 갖기 바라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존엄을 느끼길 원한다면, 특히 가난에 처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공공정책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정책은 사람들을 더 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덜 필요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가?'
만약 그들의 노동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일하려는 동기를 꺾는 정책이라면, 그들의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들이 함께 살고 서로 돌보려는 의지와 동기를 약화시키고 있다면, 그들에게 당신은 필요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공공정책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죄입니다.
이 영상이 마음에 와닿았던 이유는, 내가 삶을 바라볼 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과 깊이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주에 칸트에 대한 글을 쓰며, 나름대로 삶에 대해 여러 생각을 정리했는데, 영상 속 인터뷰에서 한 문장으로 이렇게 잘 표현해 줬다.
“사람은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야 합니다. 더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 존엄의 핵심입니다.”
가까이는 가정에서 부모로서의 역할부터, 넓게는 기업가나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역할까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곧 ‘살아갈 이유를 갖는 것’이라 느낀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크기가 커지고, 내가 돌보아야 할 사람이 많아질수록 돈이나 명예는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돈과 명예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람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삶의 길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삶에서 깊은 보람과 만족을 느낀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보다 어른들이 더 지혜로울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삶의 방향성과 중심을 단단히 잡아오신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훈수를 두는 어른들도 있다.
그럴 때는 한쪽 귀로 흘려보내고, 조용히 스스로의 길을 찾아 나올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