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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안 멋있었다.

by 실버레인 SILVERRAIN


밤길을 걷다, 노래방에서 나오는 중년의 남성과 여성을 보았다. 남성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고, 화장을 진하게 한 여성의 허리를 붙잡은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이 가려고 하자, 그는 비틀거리며 길을 막았다. 저절로 눈이 찌푸려졌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그때 문득,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남자에게 이상형은 ‘새로운 여자’라고. 아무리 곁에 누가 봐도 아름다운 아내가 있어도,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의 이야기는 들려온다. 남자가 되어보지 않아 그들의 욕구는 잘 모르겠다.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


좋은 남자를 바라기 전에, 나는 좋은 사람일까. 좋은 여자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문득, 20대 초반 할머니가 내게 해주신 조언이 떠올랐다. “너 자신을 잘 만들어라.” 그 말을 들었을 땐 뭘 만들라는 거지? 싶었지만, 이제는 조금씩 그 뜻을 알 것 같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면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 건 어쩌면 이기적인 일이다.


나는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신뢰가 무엇보다 탄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신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상대에게서 신뢰가 느껴질 때, 비로소 내 마음도 안정된다.


‘좋은’의 뜻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신뢰’의 영역이 크다.


이유가 있다.




신뢰를 주지 않았던 전 남자친구 이야기.


어느 날, 그가 내게 컴퓨터로 서류를 봐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컴퓨터를 켜자, 로그아웃되지 않은 메신저 창이 가장 먼저 떴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떤 여자와 나눈 대화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각한 그대로였다.

심증이 물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여자의 직감은 대체로 맞는다.

남자의 ‘그 느낌’.

말투, 표정, 행동에서, 애써 눈치채고 싶지 않아도 결국 알아버린다.



그는 끼가 다분한 사람이었다. (나는 순진하게 그의 언변에 넘어갔지 모..) 생일 당일에 만나지 못해 나는 전날 미역국을 끓여주었는데, 그날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거짓말했다. 미역국은 쉬었다.


거짓은 언젠가 들통나기 마련이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냥 침묵했다.

이미 머릿속에서 시나리오를 돌려서인지.

다만, ‘아닐 거야’ 하고 붙잡고 있던 마음의 끄나풀이 끊어져 많이 아팠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 그를 용서했다.

그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오래 쌓인 걱정과 속앓이 때문인지, 그의 행동이 바뀌었는데도 나는 작은 일에도 크게 부풀려 생각하게 되었다. 신뢰의 장벽이 이미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런 에너지 소비는 내 인생의 성장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였다.


그 연애로 사랑에 빠진 나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바람기가 있는 남자도 알게 되었다.

신뢰가 주는 관계의 지속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남자. 겉으로 보고 모르겠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거 아닌 거 아는데, 내가 겪은 남자가 그런 행동을 했어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속앓이를 해본 적이 있기에, ‘혹시라도’ 하는 마음이 앞선다. 내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먼저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일할 때.


한 남자와 여자가 손님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50대 중후반, 여자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여자는 물건을 천천히 고르고 있었는데, 남자가 다짜고짜 “제일 비싼 걸로 주세요”, “그냥 이거 사”, “이 색으로 주세요” 말하며 여자가 쓸 물건까지 단번에 결정해 버렸다. 그리고 자기 카드로 계산했다.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의 말투에서 여자를 하대하며 존중하지 않는 기운이 느껴졌다.


둘의 관계는 부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 ‘슈가대디(Sugar Daddy)’라는 개념이 있다.

: 주로 연령과 경제력에서 차이가 큰 남성이 젊은 여자에게 금전적. 물질적 지원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교제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 느낌을 받았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하나도 안 멋있었다.




세상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면, 삶에는 정답이 없다고들 하지만, 한편으론 정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필귀정 事必歸正 : 모든 길은 결국 바른 길로 돌아간다.


관계도 그렇다.


나는 바른 길을 계속 만들어나가고 싶지, 같은 자리를 맴도는 발걸음에 내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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