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라고 잠정적 결론을 지었다.
'어떨 때 행복을 느껴?'
여자의 삶에서 행복은..이라고 말하면 안 되겠다.
여자인 나라고 말해야겠다.
어떨 때 행복을 느끼냐라는 질문에.
"어떠한 행위를 하든 남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느껴질 때, 행복감을 느낀다.” 지금은 이렇게 답한다.
일을 하든, 피아노를 치든, 노래를 하든, 요리를 하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든. 내가 하는 어떤 행위로 상대에게 좋은 마음을 전하고, 그로 인해 상대가 편안함과 따뜻한 감정을 느낄 때, 나는 기쁨을 느낀다.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기만 했는데, 이야기를 다 마친 뒤에 “들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무슨 특별한 역할을 해준 건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설명할 수 없는 행복이 찾아온다.
그렇게 서로 교감하며 사람의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을 때,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여자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과정에서 사람으로서 한층 성숙해진다고 믿는다.
생명을 품는 일은 여성의 고유한 특권이자 축복이며, 여성은 아이를 기르며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 같다.
관찰해 보면, 양육의 과정에는 반드시 ‘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있다. 여자가 아니라, 엄마여야만 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커리어우먼들이 결혼과 출산 후 일을 잠시 중단하는 상황에 놓인다. 육아휴직을 하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동안, 이전처럼 사회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얻던 성취감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사람들의 인정도 멈춘다. 그 속에서 ‘나’를 찾는 이들은 큰 내적 어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속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점점 깨닫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오며 겪은 경험과, 나름 치열하게 생각한 끝에 내린 당장의 결론은 이것이다.
‘이래야 행복할 것 같다’
Look after 돌보다, 보살피다.
영어에서 look은 단순히 ‘보다’라는 시각적 의미를 넘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는 확장된 의미로도 쓰인다.
여기에 after가 붙으면 ~를 뒤따르며 챙기다, 뒷바라지하다라는 의미로 변한다.
따라서 look after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계속해서 지켜보며 잘 챙기다”라는 뜻이 되고, 여기에서 발전하여 ‘돌보다, 보살피다, 양육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나는 누군가를 돌보고, 대화를 나누며, 그들과 함께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깨달아 가는 것에 만족감과 살아있음을 느낀다.
나는 모성애가 큰 사람이다. 예전엔 ‘같다’였는데 점점 확신의 ‘이다’로 바뀐다.
나와 친한 주변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넌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아”, “현모양처가 될 것 같아”라고 말한다.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고 싶고, 아마 그렇게 살 것 같기 때문이다..(?)
내 사랑을 쏟고, 지켜야 할 가정이 있을 때 나는 더 뚜렷하게 나의 존재를 느낄 것 같다.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따뜻한 비타민이 되어주고,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 마음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싶다.
아이들에게는 정성 가득한 음식을 만들어주고, 잠들기 전엔 부드러운 목소리로 동화책을 읽어주며, 사랑스러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또 하늘과 땅과 바다가 되어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 순간들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며 삶으로 본이 되는 부모가 되고 싶다.
가정의 울타리가 되며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아내이자 엄마이고 싶은 것이다.
말 그대로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고 있다.
아마 나에게 최고의 칭찬은,
남편에게 “최고의 아내야”
딸에게서 “엄마처럼 되고 싶어”
아들에게서 “엄마 같은 사람 만나야지”라는 말을 듣는 게 아닐까 싶다.
글을 쓰다 내가 중세 시대에 태어났으면 더 잘 어울렸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
오늘 아침,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내려가던 중 6층에서 멈췄고, 뽁뽁이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고, 아이가 내 눈을 마주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순간 아이는 나에게 더 환한 웃음을 보내주었다.
작은 체구에, 풍성한 머리숱이 꼭 아톰 같았다. 웃으면 눈이 사라지는, 백만 불짜리 눈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 조그만 손이 내 손을 잡는 순간, 나도 모르게 찐 웃음이 터졌다.
낯선 사람에게도 무장해제 웃음을 건네는 그 아이 덕분에, 나는 하루를 웃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복도 끝을 지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기 전,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 아이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에게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직 혼자 걷지도 못하는 작은 아이가 주는, 아주 큰 힘을 느꼈다.
음...
그래서 거절했다.
나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이다.
행동이나 말투가 너무 가벼웠다.
‘아니다’ 라는 직감은 대체로 맞는다.
나는 정신적 성숙도가 부족하면, 호감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런 기운을 그 남자에게서 느꼈다.
그저께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글을 쓰면서 ‘성장하는 사랑’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았다. 남자와 여자가 한 울타리 안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함께 가정을 지켜갈 때, 비록 늘 느껴지지 않더라도 사랑은 조금씩 더 익어가고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혼생활에서 불같던 사랑이 서서히 정으로 변해간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매일 서로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나는, 내 안의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하는 사람이다.'
라고 잠정적 결론을 지었다.
왜냐면 아직 그렇게 살아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 남자 거절하고 혼자 또 주저리타임 -
Stand by me
https://www.youtube.com/watch?v=hwZNL7QVJjE
#아몰라일단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