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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Life, The Reason

안나 카레니나

by 실버레인 SILVERRAIN



어떻게 후회 없이 살 것인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부활> 등 세기의 명작을 집필한 대문호 '톨스토이'는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톨스토이가 찾은 해답은 바로 '성장'이다.


성찰과 학습을 통해 자기완성에 도달하는 과정.

나 자신을 알고,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나 자신과 훌륭한 관계를 맺으면서 더 나은 최선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

즉 성장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


또 톨스토이는 성장이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나'는 '너'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며, 상대방이 없는 나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

- 톨스토이, <인생의 길> 中 -





러시아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톨스토이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는 예술 또한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더 많은 대중에게 삶의 지혜를 전하기 위해 글을 쉽고 명확하게 썼다.




톨스토이의 인생을 바꾼 두 전환점이 있다.


1. 결혼

톨스토이는 결혼 이후 왕성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였으며, 48년간의 결혼 생활 속에서 갈등과 다툼도 많았지만, 이는 인간적. 작가적 성장을 이끄는 토대가 되었다.


2. 회심

명성과 부, 가족까지 모든 것을 가진 절정의 시기에 톨스토이는 ‘나는 왜 사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했다.


과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전쟁, 결투, 도박, 부도덕한 관계 등 수많은 잘못을 깨달았고, 깊은 회한 속에서 영적 전환을 경험했다. 이 과정이 그의 저서 <참회록>에 기록되어 있다.


톨스토이는 책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이것은 갑자기 발생한 사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오래전부터 예비된 것이었다. - 톨스토이, <참회록> 中 -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회심 직전인 1877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겉보기에는 안나가 주인공 같지만, 사실 더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톨스토이의 분신으로 불리는 ‘레빈’이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삶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전하고자 했다.





안나♥브론스키의 이야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안나는 젊고 총명한 부인으로, 고위 관료인 남편과 어린 아들과 함께 그럭저럭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스크바에 사는 오빠 스티바의 불륜 소식을 듣고 가정을 수습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한다. 모스크바역에서 안나는 잘생긴 청년 장교 브론스키와 운명처럼 마주친다.


브론스키는 그녀를 본 순간 매혹되어 열렬히 구애했고, 처음엔 거부하던 안나도 결국 그와 사랑에 빠진다.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는 불륜으로 번지고, 안나는 아들과 남편을 떠나 사랑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브론스키가 자신을 떠날까 하는 불안과 의심이 커졌고, 질투와 신경쇠약 속에서 건강마저 악화된다. 결국 절망에 빠진 안나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욕구 충족에서 시작된 관계였다. 불륜은 발전과 성장이 없는 사랑이며, 욕구 충족에서 오는 순간적인 행복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 결과, 행복은 금세 금이 가고 사랑은 집착으로 변한다. 사랑을 집착하고 소유하려 할수록 오히려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


"그는 최근에 와서 점점 더 빈번히 그녀에게서 일어나는 질투의 발작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그 질투의 원인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식어가는 자기감정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가 없었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사랑을 소유하지 못하면 증오가 찾아온다. 겉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증오가 점점 자라난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증오하고, 자신을 증오하며, 결국 세상마저 증오하게 된다. 그 끝은 자살, 즉 죽음이다. 안나의 자살은 증오에서 비롯된 자기 학대의 극단적 표현이었다.


이들의 사랑에는 성장이 없다. 사랑도 변화하는 법인데, 변함없는 사랑만을 좇는 것은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일이다. 이들은 저항하며 불행해졌고, 제자리를 맴돌다 결국 파국에 이르렀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처음 만난 장소는 기차역이며, 안나가 죽음을 맞이한 장소 또한 기차역이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제자리걸음에 불과했다.





레빈♥키티의 이야기


안나의 오빠 스티바의 친구 레빈은 스티바의 처제 키티를 좋아해 청혼한다. 그러나 키티는 브론스키를 흠모하여 레빈의 청혼을 거절한다.


하지만 브론스키는 안나를 사랑하고 있었기에, 키티는 짝사랑의 아픔을 겪으며 병을 얻는다. 요양을 위해 잠시 떠났다가 돌아오던 중, 길에서 레빈과 재회한다. 그 자리에서 레빈은 다시 한번 키티에게 청혼하고, 키티는 이를 받아들여 결혼 생활을 시작한다.



이 커플은 늘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거나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불만과 의심, 질투와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서로 소통을 멈추지 않고 함께 성장해 나갔다.


그 결과, 이상적인 가정, 서로 공감하고 기쁨이 가득한 가정으로 발전해 갔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이상적인 커플의 삶이다.





레빈의 세 가지 성장의 조건이 있다.

작가 톨스토이의 성장이기도 하다.


1. 몰입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집중 상태


레빈의 풀베기 장면

레빈은 지주였지만, 단순히 군림하는 대신 혁신적인 농장 경영을 꿈꾸었다. 그러나 농부들과 레빈 사이에는 쉽게 허물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했지만, 영지의 현실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어느 날, 레빈은 직접 풀베기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진심으로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레빈은 자신의 자아 깊은 곳으로 깊이 들어가 내면을 성찰하게 된다.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 동안이나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30분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지주라는 신분을 잠시 잊은 채 풀베기에 몰입한 레빈은 깊은 ‘몰입 상태’에 들어갔다. 몰입이란 시간의 흐름을 잊고 온전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레빈은 몰입할수록 자신을 억누르던 자아가 해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가 하는 일에는 지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는 변화가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 일이 쉬워졌다. 그러나 일단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고, 보다 잘하려고 애쓰기 시작기만 하면, 그는 갑자기 일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두둑이 잘 깎이지 않는 것이었다. "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나감에 따라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 때에는 낫 그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를 움직이고 있기라도 하듯이, 마치 요술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도 일이 저절로 정확하고 정교하게 되어 갔다. 그런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무아지경이란 정신이 한곳에 온전히 집중되어 자아를 잊은 상태를 말한다. 이때 행위 주체는 사라지고, 행위는 저절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레빈이 느낀 해방감은 바로 이 무아지경의 경험이다. 자아가 해방될 때 찾아오는 것은 지고의 행복이다.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집중할수록 일이 더욱 순조롭게 진행된다.


"레빈은 그들(농부들)에게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인에 대한 어려움은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일꾼들은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빈은 영감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잔뜩 흥미를 느끼며 그의 집안일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형보다 영감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레빈은 풀베기 과정을 통해 농부들과의 벽을 허물었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몰입 상태에 빠지면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자기중심적인 자아가 사라지면서 행위 그 자체에 온전히 집중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의 단절이 사라져 자연과 사람, 그리고 일과 하나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몰입을 통한 자아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행복과 내면의 평화를 가져다주는 길이라고 보았다.





2. 소통

톨스토이는 소통을 삶의 큰 기쁨이라 강조했다.


"이승에서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이다." - 톨스토이, <인생의 길> 中 -


여기서 융합과 일치는 '공감'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통의 1차 도구는 언어이다. 문학가로서 톨스토이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서는 거짓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주로 말로만 소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안나와 브론스키처럼, 말만 끊임없이 하는 이들은 실제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


톨스토이는 말이 많아지면 거짓도 늘어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진정한 소통자는 말을 자제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거나 눈으로 관찰하는 데 집중하는 인물들이다.




"적군 장군 다부는 눈을 들고 피에르를 천천히 쳐다보았다. 몇 초 동안인가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응시를 하는 동안 전쟁이라든가 재판이라든가 하는 일체의 조건을 초월한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두 사람 사이에 맺어졌다. 이 순간 그들은 다 어렴풋이 무수한 사물을 느꼈다. 그리고 자기들은 둘 다 인류의 아들이자 동포라는 것을 깨달았다."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中 -


주인공 피에르와 적군 사령관의 눈빛 교감. 이 침묵 속 응시는 결국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던 피에르를 생명으로 이끌었다.




"레빈은 키티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그 눈빛을 통해 그녀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녀의 그 감정은 어느 틈에 그에게로 옮아갔다. 그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밝고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키티의 얼굴에서 타오르고 있던 기쁨의 불꽃은 회당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옮은 것 같았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결혼을 앞둔 레빈은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 그리고 이 결혼이 행복을 가져다줄지 깊은 불안을 느낀다. 하지만 키티와의 눈맞춤을 통해 두 사람은 진정한 교감을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한다.


톨스토이는 진정한 공감이란 반드시 퍼져 나가며, 긍정적인 공감은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미친다고 믿었다. 이러한 공감은 결국 어느 순간 세상을 밝히는 힘으로 작용하는 진정한 교감의 힘임을 작품을 통해 보여준다.





3. 죽음의 기억

성장의 마지막 단계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열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서른다섯 살에는 가장 사랑했던 형이 세상을 떠났고, 58세에는 톨스토이 본인이 마차 사고 후유증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이후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자 철학과 종교, 사상을 깊이 탐구했다. 그는 삶을 너무나 사랑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다.


“인간은 왜 죽어야만 하는가?” 죽음을 부정하고 거부했던 톨스토이는 죽음에 대한 이해에 매진했다.


소설 속 톨스토이의 분신, 레빈 역시 죽음에 대해 고뇌한다.



레빈은 아내 키티가 아이를 낳고 난 뒤, 인생에서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순간에 죽음에 대한 깊은 공포와 존재적 불안을 경험한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앞길에는 고뇌와 죽음과 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 <안나 카레니나> 中 -




죽음을 두려워하던 레빈은 한 농부를 만나 깨달음을 얻는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레빈은 선하게 사는 데서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는 실제로 평생 죽음의 문제에 골몰했던 톨스토이가 찾은 답과도 맞닿아 있다. 톨스토이가 강조한 해답은 바로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삶’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오늘 밤까지 살라, 동시에 영원히 살라 " - <인생의 길> 中 -


이 말은 언뜻 모순된 표현처럼 들린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경험한 것을 떠올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현재와 오늘을 더욱 소중히 여기게 만들며, 죽음을 미워하거나 분노하기보다 받아들이는 태도를 뜻한다.


죽음을 기억할수록, 한 순간 한 순간이 삶의 귀한 선물이자 기쁨이며, 더욱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톨스토이는 오늘이든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유한한 삶에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원함’은 시간의 양적 무한함이 아니라, 충만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의미한다.






죽음을 기억하며 사는 삶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삶이며, 시간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시간은 흘러가며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그 변화를 거부하려는 인간의 심리가 존재한다. 그러나 죽음을 기억하면 변화를 수용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시간은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삼키는 존재가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신의 선물인 것이다.




인생길엔 아픔을 분명히 맞닥뜨리게 된다.

상처, 고뇌, 욕망, 배신, 분노, 좌절.

결국 이런 것들도 흘러간다.

인생의 모든 아픔을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약이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 인간은 성장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레빈은 결국 성장의 의미를 깨닫는다.


"나의 생활 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 <안나 카레니나> 中 마지막 문장 -


삶이 계속되는 한, 무슨 일이든 계속 일어날 것이다. 이 생각으로 평정심을 찾지만, 동시에 그 삶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도 안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며, 매 순간이 이전과는 다를 것임을 믿는다.


우리가 성장하는 한, 삶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제시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바로 ‘성장’이다.






성장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준다.


레빈이 풀베기하며 느꼈던 몰입의 기쁨.

타인과 소통하며 얻은 교감의 기쁨.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며 현재에 충실할 때 느끼는 깊은 기쁨.


이 성장의 기쁨은 단순한 욕구 충족에서 오는 행복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단순한 행복을 넘어선 ‘felicity’, 즉 극히 행복한 상태이다.


성장의 기쁨은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적이며,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삶에서 성장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성장이 멈추는 순간 삶도 행복도 함께 멈춘다.


톨스토이가 많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All happy families resemble one another ;

every unhappy family is unhappy in its own way.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행복을 느낀다면 더 이상의 비교도, 이유도 무의미하며 불행을 느끼는 순간 수많은 이유와 불만이 생긴다.



하지만 원서를 보면 그 위에 한 줄이 더 숨어있다.





Vengeance is mine, I will repay.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로마서 12:19절을 인용한 에피그래피(epigraph)이다.

에피그래피란 책, 시, 소설, 논문, 영화 등 작품 서두에 인용하는 짧은 글귀로, 작품의 주제나 분위기를 암시하거나 독자에게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처음 이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다소 뚱딴지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레빈이 성장하고 깨달음을 말하는 대목을 읽으며 그 의미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나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과거에 내게 생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내게 생명을 주고 있는 그 힘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스스로를 속이던 것에서 벗어났고, 주인을 발견했다.”


안나의 서사가 심판과 배척 속에서 끝나는 반면, 레빈은 인간의 한계와 신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적 깨달음을 얻는 자리로 나아간다.


소설 속 인물들의 갈등은 우리의 삶을 비춰주는 거울이 된다. 누군가는 끝내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깨달음을 얻어간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레빈의 성장 속에서, 톨스토이는 인간이 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레빈 속의 자신을 그리며, 훗날 자신이 더 깊은 내면에서 참회할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느라 이것저것 찾아보며 몇 시간을 붙잡고 있었다.(인터넷 발달로 이런 좋은 내용을 찾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참 감사하다.)


이 글을 쓰며 당장 내 삶이 바뀌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생각을 해본 나와 그렇지 않은 나의 삶이 아주 미세하게라도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


레빈의 대사처럼, 결국 인간이 고민하는 주제는 비슷하며 그 깨달음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겨 삶 속에서 풀어내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생활 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매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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