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인 시간의 아름다움

산티아고순례길. 아헤스 - 부르고스 22.6km

by 실버레인 SILVERRAIN

6:06 알베르게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 같다.

잠귀가 예민한데 오늘도 누군가 계속 코를 골았다.

덕분에 일찍 나왔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라 이전 마을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시골 새벽길

오늘 새벽은 돌길이어서 난이도가 꽤 상당하다.

숲 속을 지나 산등성이가 나오는데 길이 너무 넓어 내가 가고 있는 길에 100% 확신을 갖지 못했다.

좀 두려웠는데 음... 나는 직진이다.


한국인들이 만나게 되면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도 그럴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순례길을 맞닥뜨리고 싶었다. 거기서 서로 눈치를 보며 발생하는 감정을 순례길에서 소비하고 싶지 않아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나는 이 순례길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생각이 많은 편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GPS에 의존해 걷다가 십자가를 발견했다. 주변엔 나 혼자 밖에 없었고 이 길이 맞는지 확신이 없는 와중에 이 십자가의 발견은 왠지 모르게 내게 확신을 주는 순간이 되었다. 기도를 했다.

저 멀리 부르고스가 보인다.

대도시답게 이른 새벽부터 환한 불빛이 내 시선을 압도했다.

마치 내가 가는 길이 맞다고 알려주는 것 같다.

머리를 묶는 편인데 추워서 머리를 풀었다.

이 머리카락이 추위에 꽤 도움이 된다.

이제 휴대폰 불빛은 필요 없다.

앞 뒤로 순례자 없이 혼자 계속 걸었다.

저 멀리 구름사이로 달빛이 환하게 빛난다.

오늘 새벽은 유난히 추운 것 같다.

머리 푼 게 모자라 모자까지 덮어썼다.

드디어 나온 마을

쉬어갈 예정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카페인가 보다.

이걸 새벽에 다 만드셨다.

순례길의 카페는 부지런해야 한다.

동전이 제법 모여서 동전으로 냈다.

2유로, 1유로짜리가 많아지면 꽤 무게가 나간다.

오른쪽에 오렌지주스 착즙기계가 있다. 순례길 카페나 마트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다.

오렌지 생산량이 많아서 그런지 오렌지 주스 소비가 상당하다. 바로 착즙이 되어 나오는데 오렌지 주스를 사랑하는 나는 저 기계가 탐났다.ㅎㅎ

따끈한 토르티아(계란감자오믈렛?) 냄새가 너무 고소하다

사장님 포크를 삼지창처럼 바게트빵에 찍어 주셨네..ㅋㅋㅋ


하몽이랑 치즈는 가지고 다니며 한 장씩 꺼내서 먹었다.

매번 카페에서 샌드위치 사기는 돈이 아깝고 큰 마을 마트에서 바게트빵, 치즈, 하몽, 오렌지주스를 사서 며칠간 계속 먹었다. 맛있게 먹는 건 포기를 못하겠고 돈은 아끼고 싶고!

음식을 싸가지고 다니는 부분에서 식비를 많이 절약했다.

다시 출발!

새벽의 어둠을 신경 쓰며 걷던 마음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명확해지니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선명한 그림자가 태양이 얼마나 강렬한지 알려준다.

굉장히 뜬금없이 큰 나무가 나왔는데 바람에 흔들려 나에게 마치 반갑게 인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도로에 차들이 다니지 않는다.

가는 길에 해바라기도 다시 한번 보고

도시 외곽에 도착했다.

같은 형태의 큰 집들이 나란히 놓여있다.

아파트가 없어서 너무 좋다. 시야가 너무 시원해

지은 지는 얼마 안 되어 보인다.

외곽 주거지역을 지나 공장, 자동차정비소, 목재상들 자리가 많이 차지하는 건물들이 처음으로 보인다.

도시 중심부로 가는데 꽤 걸렸다.

드디어 부르고스에 도착

맥도날드를 발견하고 너무 반가웠다.

이때 아이스라테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오늘 알베르게는 선착순이라 서둘러 가기로 했다.

순례자들이 많이 거쳐가는 마을이라서 그런가? 아파트 외관에 순례자 조가비 마크를 그려놓았다.

사람들도 많이 보이고 사람들의 삶이 보여 관찰하며 걷는 게 재미있다.

아! 그리고 날씨가 다시 맑아져서 너무 좋았다 :)

구시가지로 가는 길

저 노란색 아치형 문을 통과하면 새로운 세상이 나타난다.

문이 너무 예쁘다. 나는 건축에서 아치를 발견했을 때 더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좋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따닥따닥 붙어있는 건물들과 좁아 보이는 돌길

그런데 건물들이 다 자기주장을 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역사를 잘 보존해 가는 이 유럽의 느낌이 좋다.

걷다가 에밀리라는 대만친구를 만나 부르고스에 같이 들어왔다. 이렇게 보니 순례길에서 대만 친구들 많이 사귀었네

체크인 시간까지 꽤 남아서 우리는 가방을 세워놓고 시내구경을 하기로 했다.

스페인에서는 올리브 절임이 우리나라에 장아찌정도 될 것 같다.

건물 외벽에 개미 조형물이 특이했다.

에밀리와 나는 구시가지 입구에 위치한 카페에 왔다.

아까 입구가 너무 예뻐서 오고 싶었다.

아기자기한 플라워 패턴으로 장식된 인테리어는 여자들의 마음을 끌기 충분했다.

혼자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아이스카페라테를 시켰다. 뜨거운 카페라테를 주고 다른 컵에 얼음을 따로 준다

..... 부어먹으란다..

웃음이 났다. 처음 보는 신개념 아이스카페라테

하지만 맛있게 먹었다.

카페인이 너무 필요했던 나는 원샷

오늘의 알베르게

공립 알베르게 중에 가장 최신식이었던 것 같다.

시설도 깔끔했다.

다만 2층침대에 올라가기가 불편하다.

사다리에 몇 번 찧어 멍이 들었다.

짐을 풀고 씻고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해 나왔다.

뒤에 건축물은 부르고스 성당

스페인의 맑은 날씨는 해가 뜨거워 선글라스는 필수이다.

책방에 들어가 책도 구경하고

여기는 유명한 산타 마리아 문

가로수 길도 너무 예쁘고, 걷기 딱 좋은 날이다.

트럼펫을 불고 있는 아저씨는 나의 산책길에 에너지가 되어 주셨다. 흥이 많아서 그런지 가다가 춤출 뻔했지만 자제했다....ㅎㅎ

배가 고파 에밀리와 타파스를 먹으러 간다.

스페인 사람들은 개성을 살려 옷을 잘 입는다.

패턴의 강약조절이 너무 좋다.

생동감 넘치는 거리

만석인 가게였는데 자리가 나서 다행히 금방 들어왔다.

타파스 먹을 생각에 좀 들떴다.

종류가 정말 다양한 타파스('핀초스'라고 하기도 한다.)

부르고스 전통음식 중

'모르시야'가 있는데 한국인들에게는 순대라고 불린다.

근데 맛도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디저트도 먹고

부르고스 대성당에 왔다. 순례자들은 5유로에 입장권을 구입할 수 있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 최초의 프랑스식 고딕 대성당 중 하나이며 하늘을 향해 치솟는 뾰족탑, 스테인드글라스, 아치형 천장 등이 웅장함을 자랑한다.


스페인 대성당 중에서 유일하게 단독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내부는 르네상스, 바로크, 플라테레스코양식까지 혼합되어 있고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다른 시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천장을 보면 복잡하고도 화려하며 정교한 건축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돔 천장에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너무 아름다웠다.

황홀했다.

디테일 하나하나 다 의미가 있을 텐데..

과거 누군가의 손길로 세워진 노동이, 시간이 지나도 아름답게 보존되어 그 가치를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신앙. 예술. 역사가 결합되어 이런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믿음이 무엇이기에

예배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시간을 바쳤을까?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빛은 내가 걷는 길을 더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주었다.

5유로가 너무 싸게 느껴졌다.

여운 찐하게 남긴 채 성당을 나왔다.


감사한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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