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ty : 헛됨

산티아고순례길. 부르고스 - 온타나스 31km

by 실버레인 SILVERRAIN

6:30 오늘도 출발한다.

부르고스 대성당 정말 안녕이다.

어젠 시끌벅적한 거리였는데-

새벽이 주는 감성이 있다.

앞으로 직진하는데 출근하던 스페인 현지인이 나에게

순례길을 가는 중이냐고 물어봤다.

그러면서 여기서 꺾어야 한다고 길을 알려주었다.

저 화살표는 고개를 돌려야 볼 수 있었다.

직진본능으로 엄한 길 갔다 올 뻔했다.

'길 알려줘서 너무 고마워요!' 인사하고 다시 출발한다.

확실히 대도시라 주택가가 크다.

눈 크게 뜨고 찾아야 보이는 조가비 모양이다.

도시가 커서 표식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다리를 건너면 이제 도시를 빠져나간다.

빠져나오자마자 가로등 불빛은 없어졌고

다행히 그 사이 시야가 보일 정도로 동이 텄다.

오늘은 구름

제일 좋아하는 시간

오늘은 구름이 있어서 더 장관이다.

걷다 보니 쉬어가는 마을이 나왔다.

아침 먹어야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카페로 간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팔고 있었다.

오늘도 오렌지 주스 드링킹ㅎㅎ

식사를 하고 가다가 성당이 나왔다.


시골 마을의 성당

작고 화려하진 않지만 세월의 흔적이 더 고즈넉하게 느껴진다.

수녀님의 축복기도와 목걸이도 받고

도장도 받았다.

다시 가요

오늘은 드넓은 평원을 걷는다.

31km라서 좀 긴 여정이다.

그늘도 거의 없어서 오늘 구름이 끼지 않았으면 볕이 사정없이 들이칠 뻔했다.


어제까진 대도시에 있다가 내 앞의 장면을 보니 꿈같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매 순간 풍경을 의식하며 걷는 건 아니다. 그런데 어느새 문득 주변을 돌아보면, 풍경은 확 바뀌어 있다. 도시를 지나고, 작은 마을을 통과하고, 평원과 숲길, 고원을 지나며 그 길 위에서 스쳤던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인생도 비슷한 듯하다.

과거의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그 기억 속의 나와 지금의 나를 깊이 있게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은, 삶의 방향을 더 분명하게 하고, 스스로를 성장하게 만든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큰 업적, 쾌락, 지혜. 인간이 선망하는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솔로몬 왕이 세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무의미하다고 선언하는 내용이다.


내가 다 가져본 것은 아니고, 얼마나 갖게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저 말은 어느새부턴가 마음속에서 내가 행동을 할 때 큰 나침판이 되어준 것 같다.


몇 년 전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지금도 생각하며 살아간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 이 인생이 나에게 왜 주어졌을까 생각한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명이 주어졌다.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며 잘 사용하고 싶다. 그 ‘잘’은 궁극적으로 이웃사랑이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사교적인 편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갈수록, 각자의 가치관이 분명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이 왠지 모르게 부질없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딘가 따로 떨어져 있는 느낌.

그럴 때마다 나는 삶을 파고드는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당장 답이 나오지 않아도, 그런 질문들이 좋다. 그래서 부쩍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거나 마음 맞는 친구 소수와 깊게 이야기한다.


친구들은 ‘너 생각이 너무 많다. 그런 거 왜 생각해’ 했지만

이게 난데 어떡해

이렇게 살아야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멈췄다가

다시 걷는다.

날씨 때문인가 집 한 채 덩그러니

쓸쓸해 보인다.

이제 거의 다 도착했다.

정말 도착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처음에 내 눈을 의심했다.

태극기가 여기 왜 걸려있지?

스페인 이 작은 마을에?

알베르게에 도착

아늑한 숙소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태극기 다시 재확인

왜 걸려있는지 묻는다는 걸 까먹었네...

손빨래도 하고

늦게 도착한 날은 내일 아침까지 잘 마르길 바라며 최선을 다해 물기를 짠다.

씻고 산책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두통이 너무 심해지고 몸에 힘이 쭉 빠진다.

급히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약 먹고 쪽잠을 잤다.

한숨 자고 나니 저녁시간

저녁은 순례자들이 모여 같이 먹는 '커뮤니티 디너'

우중충하기도 하고 건물 외관색 때문에 그런지

사막에 지은 집들 같네

넓은 평원 한가운데 마을이 있어 세상과 동 떨어진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먹는 신선한 샐러드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리고 대왕 치킨빠에야

순례자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먹은 저녁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바쁘게 스쳐가는 여행이 아닌 천천히 걷는 이 순례길 위에서, 나는 나도 몰랐던 생각들과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keyword
이전 18화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