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유산

by 김이난달


1. 3,200만 원. A 병원에서 받은 첫 번째 입원비였다.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았더라면, 병원에 내야 할 금액이었다. 구급차를 탄 시간을 기준으로 잡아도 아빠가 떠난 지 18시간이 흘렀다. 사람 목숨에 값을 매길 수 있냐는 물음을 속으로 생각해본 나는 이내 답을 얻었다. 형은 “병원비가 3천만 원이 넘게 나왔으면, 적어도 3일은 살렸어야 했어.”라고 어느 취한 밤 이야기했다.


2. 그날 밤. 나는 참 많은 동의를 해야 했고, 서명해야 했다. 아빠의 수술은 7시간에 걸친 큰 수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많은 동의가 “네가 낼 수술비가 이 만큼 많을 거다.”와 “네가 동의했으니 우리는 책임이 없다.”라고 보였다. 그때마다 A 병원 응급실로 향한 구급 대원이 미웠다. 알 수 없는 말로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지역 대학 병원은 자리가 없다며 더 큰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이 소식을 형에게 전했다. 형은 나지막하게 “거기 병원비 비싼데”라고 말했다. 형제란 어느 순간부터 생각마저 비슷해지나 보다.


3. 의사들은 상황이 안 좋다며 수술해야 한다 강조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래서 수술비는 얼마 정도 나오죠?”라고 묻고 싶었다. 그렇다고 병원비 때문에 수술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겁쟁이라 다행이었다.


4. 퇴원 절차는 간단했지만 무서웠다. 장례식장을 정하고 돈을 내면 병원에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장 병원비 모두를 지급할 돈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아빠의 시신을 A 병원 장례식장 지하 한 복도에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린 백방으로 돈을 구했다. 친인척과 지인, 보험사는 물론이고 대출도 알아봤다. 가족이 누가 아프면 집안이 망하는 경우를 드라마에서 여럿 봤다. 현실이었다.


5. 다행스럽게도 ‘응급 의료비 대불 제도’라는 걸 알게 됐다. 국가가 국민이 지급해야 할 의료비를 임시로 내주는 것이 기조인 제도였다. 대부분 사람이 모르는 제도였다. 그래서일까. 야간에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병원 응급실 원무과 직원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이내 안된다고 했다. 병원비 내라고 했다. 나는 해당 공공기관에 전화했지만, 업무 종료 시각이라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엄마가 온갖 사정을 하면서 눈물 어린 호소를 하고 나서야 직원은 움직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이 없어 서러웠다. 더는 아빠가 아닌 몸에서 나온 피가 머리를 감싸던 천을 붉게 만들고 나서야 우린 그 차가운 복도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6. 나는 별별 각서를 다 써야 했다. 철저한 을이었고 채무자였다. 우선 내가 60만 원을 냈고, 사망 진단서 2장을 받았다. 사람이 죽고 난 후 사망 진단서가 8장 내외는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2장으로는 장례식장 등록과 화장터 이용만 가능했다.


7. 우리 담당 지역 동사무소에서 300만 원 정도를 지원해주는 제도도 있었다. 그곳에서 직접 병원에 입금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생각보다 대한민국은 살기 좋은 나라였다.


8. 그런데도 병원비 걱정이 컸다. 장례식이 끝나면서도 눈앞이 캄캄했다. 사망 진단서를 더 받기 위해 다가오는 월요일에 병원에 가야 했다. 그때 병원 법무팀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다 처리했으니 원무과에서 사망 진단서를 받으라고 했다. 그날 내가 낸 금액은 7만 원이었다.


9. 새로운 진단서에는 총 3,500만 원이 찍혀있었다. 건강보험과 국가에서 지원받은 돈을 빼니 병원비는 67만 원이었다. 아빠에게 미안했다.


10. 나는 사망 신고를 하면서 아빠의 모든 금융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서비스를 신청했다. 참 다양한 곳에서 문자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아빠는 단 한 푼의 빚도 없었다.


11. 브런치에 글을 쓰는 건 예전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주제로 처음 지원서를 적어야 하는지 항상 고민이었다. 내 브런치 처음은 아빠에 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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