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아빠는 내가 숨 쉬는 시공간에 없지만 참 많은 곳에서 보인다. 그때도 그랬다.
학창 시절 나는 새 학기가 싫었다. 방학이 끝나면 매주 월요일을 맞이하는 직장인들처럼 죽어도 학교에 가기 싫었다. 학기 중에는 정해진 등교 시간보다 1시간이나 빨리 갔던 아이는, 개학식만 되면 아슬아슬하게 지각을 면하곤 했다.
새 학기는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그때마다 수많은 가정통신문이 나를 괴롭혔다. 학교 운영비 납부를 위한 은행 계좌를 적어야 했고, 방과 후 활동이나 계발 활동 조사를 위한 종이가 많았다. 가족 인적 사항을 적어 담임 선생님께 제출하는 건 백미였다. 어린 시절의 나는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구조였다.
언제였을까? 내가 ‘가정’ 통신문을 ‘가정’의 다른 구성원들이 아닌 혼자 처리하기 시작한 때는. 아마 글자를 온전히 읽을 줄 알았던 때였나 보다.
어느 날, 엄마는 본인의 수첩을 주면서 여기에 자신이 말한 금액을 써달라고 말했다. 은행에서 돈을 찾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때마다 또박또박 써달라는 엄마의 말처럼, 세상 어느 글씨보다 크고 반듯하게 썼다. 때때로 정말 귀찮았다. 단 몇 단어지만, 그 몇 단어 때문에 짜증이 났다. 내가 엄마의 처지를 이해한 건 뇌졸중으로 쓰러진 작년 초겨울이었다.
형을 제외하면 나름 고학년 자였던 아빠는 글을 알았다. 그러나 언제나 무언가로 반쯤 취한 사람에게 나를 맡길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믿기로 했다. 잘못된 믿음은 가족 간의 대화가 줄어드는 데 일조했다. 어린 시절 의 내가 가정통신문을 독차지했다. 적어도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와 아빠는 몰랐다. 이를테면, 며칠간 어디로 수학여행을 간다고 하자. 내가 부모님께 말한 내용은 얼마를 언제까지 내야 한다고 전하는 식이었다. 계산적인 관계였다.
나는 누구에게나 최대한 정상적인 가정을 가진 아이로 보이고 싶었다. 이런 종류의 문서는 선생님 본인만 본다지만, 나는 믿을 수 없었다. 학교에선 맨 뒤에 있는 사람이 종이를 걷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내 손을 떠난 종이가 더미로 5 초안에 사라지더라도 볼 수 있는 건 많다고 믿었다. 난 그 시간조차 다른 애들에게 허용하기 싫었다. 찰나의 순간조차 진실을 드러내기에 내가 가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돈은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그만이라지만 없는 일을 만드는 건 괴로웠다. 형제간의 성이 다른 것과 주소가 형편없다던가 따위는 두 번째 문제였다. 아빠의 직업란을 채우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본 아빠의 직업은 일용직 노동자였다. 세상에 수만 가지 직업이 있다지만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 나는 부끄러웠다. 아빠의 직업이 부끄러웠고, 사실대로 적을 수 없었던 스스로가 더 부끄러웠다. 결국, 아빠는 수많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둔갑했다. 아빠가 직업란에 ‘공공근로 근로자’로 적힌 건 교복을 그만 입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