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첫제사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

용서는 결코 쉬운 게 아니다

by 김이난달


어제 아빠 첫제사를 지냈다. 작은 아버지가 못 오심에 따라 제사를 형제끼리 지내게 됐다. 작은 아버지는 장례식이나 설날 차례를 주도하시면서 집안의 큰 어른 역할을 하셨다. 형제는 큰 어른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래 봤자 제사를 전개하는 과정이나 아빠 관련된 이야기, 덕담 나누기 정도일 뿐이지만.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장례식 역시 그렇다. 그때 감정도 기억이 나고 얼마나 울었는지도 안다. 그때 울음의 의미와 든 생각도 기억난다. 나는 그저 '잘해주지 못했다'라는 '나'에 대해 슬프고 화가 나서 울었다. 아빠가 보고 싶다거나 불효해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는 게 아니었다. 당장 수술비가 두려웠고 돈이 없어 병원에서 나가지 못했던 그 순간들이 슬펐다. 사회 안에서 무기력했던 내가 슬펐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수많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하던 날이 떠오른다. 보호자로서 나는 아빠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지병은 뭐였는지 먹는 약은 어떤 게 있었는지 나는 몰랐다. 그때는 그게 불효인 줄 알았다. 곰곰이 돌아보니 내 마음이 거기까지였다.


제사상을 볼 때 내 마음을 돌아봤다. 난 고생한 엄마만 생각났다. 제사를 준비할 때 나는 엄마를 돕지 못했다. 회사가 바쁜 시기에 들어섰고 야근을 한 것도 이유다. 하지만 형은 금전적으로 엄마를 도왔다. 마음이 없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예민했는데 아마 그 자리조차 불편했나 보다. 엄마를 돕지 않은 미안한 마음과 함께.


용서는 성찰 없이 안 되는 거였다. 누군가의 강요나 혼자서 하는 건 용서가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는 망각으로 인해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몸에 난 상처처럼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없는 거다.


태어나서 단 한 번 타인의 폭력으로 피를 봤다. 아빠였다. 미성년자에게 술 사 오라고 매일같이 시켰다. 아빠였다. 집 거실에서 태연하게 다른 여자와 통화하는 사람, 아빠였다. 엄마 때리던 사람, 아빠였다. 같이 안 살 때 마음이 더 편한 사람이 바로 아빠였다.


형은 말했다. 그동안 원망도 많이 하고 싫어했지만 본인을 위해 여기저기 대출을 알아보던 그 날. 그리고 받지 못했던 그날. 멋쩍게 가진 게 없어 미안하다고 한 그날 용서했다고. 그게 부모 마음이라고. 그 이야기를 아빠가 수술하던 그날과 이후 제사나 명절 때 매번 듣곤 한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매번 잔소리하는 본인 때문에 힘들었을 거다, 이것 저것 하지 말라해서 고생했다처럼 말하곤 하면서 돌아봤다.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에선 아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사실 용서고 자시고 할 게 없는 게 아빠에겐 아무런 생각이 없다. 이미 내 마음에서 비운 지 오래인 사람이다.


그동안 괜찮을 줄 알았다. 엄마와 형이 표현하는 것처럼 아빠가 동정의 대상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족일지언정 나는 엄마나 형과 다른 사람이다. 아빠와 나 사이 관계는 다른 누구가 아닌 둘만이 정의할 수 있다. 마음의 상처나 트라우마는 누군가 강요해서 치료되는 게 아니다. 고통의 기억은 시간으로 인해 잠시 잊히는 거고 다시 대면하면 또 살아난다. 아마 난 그 일들을 평생을 잊지 못할 거다.


성찰 없는 용서는 외면과 방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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