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치 길이 잘 닦여져 그리로만 다니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시멘트로 발라 시원하지만 뻣뻣하다. 다행한 것은 중간쯤에 습지공원이 있다는 것. 창포와 노랑어리연이 피기까지는 아직 먼 이야기이다. 버들이 흐르는 듯 하늘거린다.
그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옆구리로 빠져 들어가 해찰을 부릴 대로 부리고 나서면 다시 반듯한 길과 마주한다. 돌아온 만큼의 길이가 줄어든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강과 가차웠던 순간은 시간에 담기지 않고 길이 접힌 느낌이랄까.
얼비치는 나무의 물그림자가 흔들린다. 실바람의 흔적이다. 설핏 파르랗게 보일락 말락 하더니 나날이 짙어져 간다. 첫봄으로의 초대다. 산소같이 내 보내는 새잎이다. 나에게 봄은 강의 나무들이 솟쳐내는 푸릇한 빛깔로부터 온다. 연한 연두의 물이 번지기 시작할 때 그 무엇보다도 참하다. 해가 길게 돋아날수록 무성해지는 잎들. 어느 결에 나무들은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주인공으로 나선다.
그림책 속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안노의 여행 그림책에 나오는 듯이. 어디에나 봄의 물결은 비슷한가 보다.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마리아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뜰을 거니는 듯 착각에 들기도 한다. 때론 팍팍하지 않은 부드러운 길로만 걷고 싶은 마음이 인다.
사계절을 보아온 곳이지만 봄의 정원에서 나를 가장 잘 바라보게 된다. 생떼를 써서라도 화려한 꽃이 되기를 바랐던 시절에는 늘 애면글면 했다. 모자람이 주는 아픔을 곱씹었다. 작은 들꽃에 눈을 맞추는 것은 눈높이를 낮추었다는 뜻인지도. 수수하고 앙증맞은 것도 소중하다는 생각은 나를 나되게 한다.
풀꽃들의 숨소리가 들려온 지가 한참이다. 결 고운 노래가 퍼지기 시작하면 걷는 걸음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어느 시인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한 것처럼 세세히 보느라 시간만 저만큼 가 있다. 봄 까치꽃이 합주를 시작하면 민들레와 제비꽃도 맞장구다. 봄맞이꽃이 봄 길을 하얗게 내면 꽃마리가 수줍고 연달아 황새냉이와 주름잎들도 보아달라고 아우성이다.
나를 닮은 잔잔한 것들의 화음은 끝없이 울려 난다. 있는 것도 없는 것도 같이, 듬성듬성 부분을 차지한다. 들꽃들의 작은 세상이다. 꽃이 피어나지 않는 봄이 있을 수 있을까. 상상이 안 된다. 마음에 두른 연두의 스카프와 연한 색 물빛 드레스로 치장하고 사뿐히 걸으면 나도 봄꽃이 된다.
징검다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그 어릴 적 돌다리를 처음 마주했던 날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어린아이가 건너기에 돌과 돌 사이가 너무 멀었던. 주먹 꼭 쥐고 힘껏 뛰었던 그때에 다시 서는 것이다. 이제는 넉넉히 건널 수 있건 만 옛날로 순간 이동을 하는 듯 조심스럽다. 한 개 한 개 쭈뼛거리며 건넌다. 다른 생각을 안 하고 몰두한다. 한 때의 기억은 참 오래도록 나를 가둔다. 살금살금 밟아온 다리를 건너와 뒤 돌 아다보면 삐뚤거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선 것들이 가지런해 보인다. 내일 또 거닐 곳이지만 마지막인 것처럼 아련하다.
길 줄임이 끝나면 언제 노닐었냐는 듯 부지런히 걷는다. 눈으로는 앉은뱅이 꽃을 찾는다. 보아내지 못한 야생화가 눈에 띄면 입이 벙그러진다. 삶은 어쩌면 멈추지 않고 뭔가에 눈뜨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목마름은 안에서부터 차오른다. 꼬불쳐 두었던 한숨 같은 것들이 잦아든다. 내 안의 나를 만나는 곳에서 새로움을 찾아 길을 걷고 있는 것도 같다. 숨어있는 나를 보아내 다독이고 다시금 길을 재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