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시 수업이 있는 날은 어중간하다. 어물 쩍 거리다가는 시간에 쫓긴다. 나가는 남편을 따라나선다. 학교까지 데려다주라고. 일찌거니 나서서 여유로운 시간을 마주하겠다는 마음이다.
그날도 그랬다. 학교 옹달샘에 가서 호젓하게 아침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시간에 오면 사람들이 많아 커피만 들고 나온다. 아홉 시 반쯤이니 한가하겠다 싶어 커피 집에 들어선다. 조용한 도서관이 옆에 있지만 마음만 그곳으로 간다. 음식물 반입금지라는 말이 발목을 잡는다. 커피의 유혹은 뿌리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도서관도 마시는 것 정도는 허락하면 안 되는 것인지.
책 읽다가 수업시간 다 돼서야 일어나면 되겠거니 싶다. ‘이런 기특한 생각도 하다니’ 하면서 입 꼬리를 살짝 올린다. 향긋함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받아 침엽수들이 모여 있는 동산과 마주한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는다. 계절감이 다른 곳에 온 느낌.
학생 두엇과 아저씨 둘. 나이가 들어 보이는 그이들은 나보다는 일고여덟 살 많아 보인다. 내 눈과 귀로 정보를 어림잡는다. 서로 오랜만에 만난 분들일까. 이른 시간에 약속을 잡았다는 것은 스스럼없는 사이일 텐데. 집 앞 전나무 이야기도 나왔다가,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추억이 주제가 아닌가 싶다. 쉴 새 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는 것이 신기하다. 아주머니들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아저씨들도 만만치 않다. 목소리를 조금만 낮추면 좋겠는데.
귀 기울이지 않으려고 책을 읽으면서 창밖 나무와 바위에 집중해본다. 침엽수들은 겨울이 제 계절인 듯. 옹송그리며 서 있는 것 같지만 활개를 치는 것일 수 있다. 고요로운 계절을 맞이한 침엽수들이 안으로 침잠하면 저런 색이 뿜어져 나오는가. 길을 오며 가며 키가 큰 소나무들과 마주하게 된다. 잎 떨어낸 다른 나무들 때문에 더 도드라져 자주 눈에 뜨이는 것은 아닌지.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소나무는 뭔가 다르다. 흑 빛도 아니면서 초록도 아닌 그 중간쯤의 뭐라 말할 수 있으려나. 바늘잎을 비켜나는 바람소리로 겨울의 깊이를 가늠한다.
한 시간쯤 흐르자 아저씨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문을 열고 나가는데 여운처럼 새소리 몇 자락 건너온다. 카페 안이 청아함으로 가득 찬다. 내 귀가 갑자기 커져서 그 소리를 따라가는 것 같다. 거슬림이 삽시간에 사라진다. 언제 그렇기나 했나 싶게.
눈을 뜨면 대숲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참새 소리로 아침이 열리던 때. 새소리 들은 효과음처럼 매양 들리는 것이어서 그런 것이려니 했다. 도회지의 아침은 달랐다. 다른 소음들로 채워졌다. 어느 순간 가슴이 답답해지는 우울을 경험했다. 새소리를 찾아 나서곤 하던 시간들. 길들여진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이들이 어릴 때 십자매를 키웠다. 가족 톡에, 너희들 어렸을 때 새를 키웠는데 기억하느냐고. 반응이 없다. 심지어 남편은 새를 키웠던 적이 있느냐고 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것이 사람인가. 그 조그마한 녀석들이 알을 낳아 품어 새끼까지 부화했는데. 내 성격상 좋은 일이 생겼다고 동네방네 떠들었을 것이 빤한데도 기억하는 이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나뉜다. 큰딸은 스푼으로 알을 살살 돌려주어 품게 했다고. 나이가 가장 어렸던 막내는 새가 있었던 것은 생각나지만 소리에 대한 것은 잘 모르겠다고.
새를 기르며 느꼈던 감동은 빛깔과 소리로 내 안에 잠겨있다. 가족이라는 끄나풀은 이런 작은 것들을 같이 한 데서 이어지는 것이지. 한 울타리 안에서 생각을 나누고,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시간들. 한 소절 새소리에 먼 기억이 실타래의 실 끈처럼 달려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