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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Jan 11. 2023

엄마만 없네요

     어머니가 떠나신 남편 고향집에 들렀다. 지난주에 눈이 내렸는지 응달진 곳에는 솜이불을 덮어놓은 것 같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니 국도로 가보기로 한다. 삼십 년을 어머니 뵈러 다녔지만 새로운 길로 가본 적이 까마득하다. 지각하면 혼내는 무서운 선생님 때문에 곧장 학교로 가게 되는 것처럼 해찰을 부리지 않고 목적지만 곧이곧대로 다녔다.


  조금만 늦어도 전화를 해서 어디만큼 오는지 살피시던 어머니. 그때는 어련히 알아서 갈 것인데 저렇게 안달하시나 싶어 며느리로서 입이 나오곤 했다. 아버님 떠나보내시고 십 년을 더 사셨으니 외로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실 때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진정한 이해는 시간이 흐른 다음 찾아오는가.


  내비게이션도 헛갈리는지 도통 어려워한다. 고향 동네를 찾아가면서 헤매기는 처음이다. 인공위성에 찍히기도 어려운 지형인가. 꼬불꼬불한 길이어서 더 그렇다. 언덕배기로 난 좁다란 길에 차가 매달리면서 오르는 것 같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차마고도 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동네가 가까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낯설다.


 무슨무슨 농장이나 농원이라고 써진 들이 빼곡하다. 살아남기 시리즈로 과수농사를 한 것일까. 열매를 나누어주고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지쳐 보인다. 앙상한 뼈마디가 쑤시는 듯 나이가 들어 보인다. 넓은 들이 없어 곡식을 심어 살아가기에 무리가 있었나 보다. 경치가 수려하지도 않으니 찾는 이도 없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태백산맥에도 이런 동네를 묘사한 부분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립을 연다. 오랜만에 기지개를 켠다는 듯 끼익 소리를 내면서 가슴을 연다. 태양열을 이용한 조명등이 화단에도 창 앞에도 꽂혀있다. 어머니 없는 집에 밤마다 조명등은 쏘아 올려지고, 오색 빛으로 빛났을 수많은 밤들.  


  오는 중에 보일러가 터진 것 같다고 윗집 형님의 전화를 했었다. 알고 가는 것 같이 느껴졌는데. 그래서 더 불안했다. 맨 먼저 보일러실로 가본다. 아무렇지도 않다. 지붕에 쌓였던 눈이 녹아 홈통으로 흘러 바닥을 적셔놓으니 착각하기 쉬웠겠다. 남편과 손바닥을 마주친다.

 

  뽑아도 잡히지 않던 사나운 잡초들은 누리끼리하게 힘을 빼고 누워있다. 저것을 언제 거두나. 두 사람이 달라붙어 보아야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 빤히 보인다. 일을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가족 모두를 모으던지, 설날에 우리 아이들의 손을 빌려야 하지 않을까 이 궁리 저 궁리.


   뒷밭에도 마른풀들이 수북이 덮여 있다. 시멘트 마당이 있는 집과는 또 다르다. 씨를 뿌렸던 노란 코스모스들의 빈 대궁만 까만 씨를 달고 바람에 흔들린다. 사람 손길이 멀어지자 황금사철도 시나브로 죽고 몇 그루 남지 않았다.


  윗집 마을 형님네서 밤을 딴다고 하더니, 잡초를 없앤다고 철쭉까지 잘라버렸는가. 지금쯤 물이 오르고 꽃 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 뿌리야 살아서 순을 내주겠지만 자라기까지는 몇 개의 달력이 뜯어지고 새로 걸려야 할지. 나무와 풀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 속상하다. 조금만 살피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가을에는 밤을 우리가 딴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 가시고 고향집에 자주 다닐 것 같던 남편이 그렇지를 않아서 의아했었다. 마음을 추스르느라 그렇겠지 하는 생각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약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찾던 어머니를 며느리가 모실 수 없다고 하자 큰 시누이가 모셔가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까. 그런저런 와중에서 생기는 갈등들이 힘들었나. 처지가 모시기 어려운 것은 맞으나,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였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어머니의 빈자리가 뭉텅뭉텅 빠진 머리털처럼 이곳저곳에 구멍이 나 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안다더니. 어머니 가시고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도 집 풍경이 그렇다. 수도가 넘어져 손보고, 집안의 묵은 공기를 내보내고 숨을 쉬게 한다. 화분에 물 주고 이곳저곳을 살핀다. 외출로 된 보일러도 운전을 하게 해 준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 아무리 따뜻하게 하고 계시라 해도 춥게만 계셨었는데. 구들에 따스한 물이 돌고 싱크 대에 물이 용트림을 한다. 집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하다.


  집안 곳곳을 영상으로 담는다. 어머니 사진을 맨 먼저 넣고, 침대와 창, 거실과 집안 구석구석을 찍어본다. 형제들에게 집을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얼마나 그리울까. 남편은 찍지 말라고 한다. 남자와 여자는 정서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거실과 부엌 다른 방들을 휘휘 두르고 마지막 거실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에서 멈춘다. 사진 속 우리 아이들이 어리다. 이제 청년이 되었으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그걸 왜 찍느냐고 핀잔하던 남편에게 가족 톡 방에 올리라고 보챈다.

 바로 큰 시누이가 답을 한다.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엄마만 없네요.’

 작은 시누이는 ‘집 구경 시켜줘서 감사합니다.’

집에 대한 그리움이, 곧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는지. 집은 어머니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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