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딸이 방학이 되어도 계절학기 듣는다고 내려오지 않는다. 휴학 기간을 꽉꽉 눌러 채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까지 버팅기다 졸업을 하긴 하려는지. 여름이 가고, 겨울에도 오지 못했다.
졸업반인데 수료만 하고 한 학기 더 공부해야 한다고 미룬다. 한가하게 살지 않기에 이해는 가면서도 마음 한쪽이 씨물거린다. 설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물음에 고양이를 맡아줄 사람을 못 구해 내려오기가 어렵겠다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미안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알면서 뭘 묻느냐는 식의 성깔을 내비치기 코앞이다. 전화를 끊어야 될 때가 되었음을 감지한다.
작은 딸이 집에 내려올 때는 오빠와, 남자친구,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고양이 집사의 일을 본다. 고양이가 남자보다는 여자를 좋아한다고. 동물도 성이 다른 것을 안다는 이야기이다. 내가 갔을 때 고양이가 놀래서 이불속으로 숨어들었다. 내 자식도 못 보게 하는 녀석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나 싶어 이불을 들치니 더욱 깊이 파고든다. 질세라 더 떠들치고 빠끔 보이는 얼굴을 보려 하자 보일러실로 도망친다. 우리가 가야 나올 것이란다. 오래 머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고양이 집에 들른 것 같은.
겁이 많아서 낯선 이들과 섣불리 사귀지를 못한다고. 산책이라도 하고 오라고 문을 열어주어도 못 나간다는. 사람에 의하여 철저하게 길이 든 애완동물의 세계다. 바깥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과 집 안에서 주인 바라기만 하고 사는 것 중 어느 것이 맞는지 구분이 잘 안 된다. 주는 것 먹고 비바람 피하고 편하게 사는 것이 좋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이라고 배운 것 같은데.
나만 좋아해 주고, 나만 쫓아다니는 무엇이 있다 생각하면 붕 뜬 기분이 들까. 오로지 나바라기하고 주는 사랑으로 만족하는 생명체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인지도. 반려동물, 반려식물, 다음은 무엇일까.
작은 딸하고 길게 이야기하면 꼭 감정이 울퉁불퉁해진다. 그래서 조심한다. 전화보다는 카카오톡으로 소식을 주고받는 것이 속이 편하다. 내가 고양이도 아닌데 은근하게 길들여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마찰을 자주 하는 것은 나랑 성격이 비슷해 그럴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싸울 자신이 없어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흘러가게 둔다. 다 큰 자식 내 맘대로 하려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니.
두 딸이 늦깎이로 공부한 엄마 졸업여행을 제주도로 보내준다고. 큰 딸이 삼월이 바쁘다고 작은 딸하고 먼저 가고, 나중 자기랑 다시 가면 안 되느냐는 말에 내가 펄쩍 뛰었다. 핑계는 두 번 가게 되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에둘러 말했다. 혹여 작은 딸과 여행 가서 싸우게 될까 봐 그런다는 말은 마음속에 꽁꽁 숨겨두었다. 남편도 나랑 같은 생각이어서 사월로 미루었다.
똑같아가지고 왜 딸과 맨날 싸우느냐고 좀 받아주지! 핀잔주는 남편이 더 밉다. 자기는 너그러워 자식들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이 좁은 마누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어쩌면 같은 성이라서 자꾸 부딪히는 것은 아닌지. 시간이 가니 면역이 생기는 것도 같고.
어제 식물교실에서 할 ‘겨울나무’ ‘보기’ 작업을 했다. 딸이 보내온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붓이 너무 커서 물감이 헤픈 것 같다고 했더니 바로 작은 붓으로 보내준다. 그런 것은 참 잘한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주는 재미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그나저나 이번 설은 고양이에게 밀려나 딸보는 것이 또 어렵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