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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Mar 31. 2023

팥꽃나무아래

 나무를 가지러 가기가 어중간하다. 나무 파는 분이 농장에 있다기에 집에 가는 길에 가져다주라고 했다. 검은 봉지를 열어 두 그루의 나무를 내 보이며 먼저 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있으니 고르라고. 나무를 보려면 큰 것을 하고 꽃을 보려면 가지가 많은 것을 하란다. 나무에 빠져 있다 보니 생긴 것이 준수한 교목 같은 나무 쪽으로 기울었다. 관목인데도 나무가 곧다. 지금 생각하면 화분에 키우기에는 다른 나무가 낫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속담 때문일 것이다.


  팥꽃나무는 심을 때 강 전정을 해야만 살 수 있다고. 나무 모양이 멋져서 좋아했는데 사정없이 자르고 심으라니 실망스럽다. 나무를 살리는 것이 먼저이니 어쩔 수 없다. 꺾꽂이도  뿌리꽂이로 된다는데 뿌리가 나무에 비해 약하다. 뿌리를 자를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저 뿌리로 지탱하려면 나무가 볼품이 없어지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언짢아진다. 뿌리를 왜 이렇게 만들어 왔을까. 삽으로 파내기가 힘들어서인 것 같다. 가져온 분이 내 또래의 아줌마였으니 힘에 부쳤을 것이다.


  나무를 사정없이 잘랐다. 우아함이 없어지고 쪼그라진듯하다. 꽃 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른다. 꽃 알을 매단 가녀린 가지 몇 개만 남겨 아쉬운 마음을 다스린다. 나무는 그다음 해부터 보기 위하여 심는다고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우선 꽃부터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마추어 속내를 겨우 진정시킨다. 피지 않고 조롱조롱 붙어있는 것들이 영락없이 팥 알갱이 같다. 사진에서 본 꽃들은 연보라인 듯 분홍인 듯한데. 뭐랄까. 피지 않은 꽃 알갱이들은 팥물 삶아낼 때의 그 표현하기 어려운 색을 닮았다. 아쉬운 대로 몇 가지 남겼으니 꽃 피어나 보면 알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늘에 두고 한 삼일은 날마다 물을 넘치게 부어주었다. 밉든 곱든 나무를 살려야 하니까.  실뿌리가 돋아났을까? 궁금하다. 파 볼 수도 없고 진득하게 참아야 한다. 팥꽃이 피어나면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겠지. 다행히 비도 내려주어 이제는 살았을 것이라는 기대에 찼다. 화목류와 초화류가 갖는 의미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팥꽃나무가 한 때 위기의 나무였다는데. 십여 년의 임진왜란이 벌어진 그 시간 여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 갔을까 생각하면 말을 잊어야 한다. 낙태약으로 팥꽃을 먹었다는 몸부림과 여인들이 목숨을 끊고자 할 때 이용했다는 슬픈 이야기. 나라에서는 지방 관리들을 통하여 팥꽃나무를 모조리 베어버리라고 명령할 정도였다니. 오희문의 『쇄미록』에 임진왜란시 구 년 삼 개월의 낱낱의 이야기가 일기로 적혀있다. 부모를 잃고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이 동냥하러 오다가 어느 날부터 구걸하러 오는 소리마저 끊어진 것을 보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아이들이 다 죽었나 보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먹먹해진다.


  그런 슬픈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나무인 줄 알았다면 나는 나무를 샀을까. 그 꽃을 보고 마냥 좋아할 수 있을는지. 수수꽃다리와 비슷하지만 꽃 알이 조금 더 크고 색이 더 선명하여 꽃 자체만 놓고 본다면 정원수로 너무나 훌륭하다. 여름 꽃 배롱나무처럼 피어있는 기간이 길어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봄꽃 한그루 정원에 심어 놓으면 그 주위가 환하니 봄이 머물고 있는 것 같을지도.

 

 나무가 살그머니 꽃잎을 열기 시작한다. 향기를 머금지를 못한 것이 아쉽다. 수수꽃다리와 비교해 보니 꽃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슬픔이 깃든 것은 나무 잘못이 아니니 울안에 들어온 나무를 너그럽게 봐주기로 한다. 저 예쁜 것을 어떻게 아파하며 볼 것인가.  꽃은 꽃이다. 햇빛 잘 드는 곳으로 옮겨주어야겠다.   

    

*우리 문화신문 한국의 자원이야기 23에서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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