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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May 06. 2023

엄마의 정원

 겨울에는 보아내지 못한 곳이었다. 봄의 화려한 왈츠 때문인지 아기자기한 정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너머로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꼭 정원에서 바다를 들여놓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사월에 처음 보았을 때의 앙증맞음이 오월에는 훨씬 화려한 자태로 뽐을 내고. 이렇게나 눈부실 수 있다는 것에 눈도 멀고 마음도 먼다. 넓지 않은 곳에 살포시 꽃들만이 내려앉은 꽃의 계절이 그곳에만 있는 듯하다.


 주인아주머니 곧 주인공인 '엄마의 정원'을 가꾼 ‘엄마’이신 분의 말이 나이 들어 다리는 아프고 여행을 다닐 여력이 안 되니 이곳에 꽃을 가꾸고 여행하는 듯 본다고. 가장 행복한 것은 그 아름다움을 살아내는 것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것도 같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모여와 옹기종기 맞대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이렇게 오밀조밀 꽃들이 합창하듯이 피어 있는 곳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순천국가정원을 가면 주제 정원이 많고, 의식과 형식으로 흐른다. 꽃 천지이지만  꽃들을 들여와 심었다는 것이 보인다. 여기는 여러해살이 꽃들이 피어난다. 한 십 년 꽃을 키우다 보니 어떻게 하든지 돈이 덜 드는 녀석들로만 식구를 늘렸다고 한다.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진다. 이곳에 서 있으면 나도 한 송이 꽃이 된다. 손톱에 봉숭아물이 들듯이 마음에 몸에 꽃물이 드는 것 같다.


  작년에 전라남도 예쁜 정원 콘테스트에서 특별상에 뽑혔다고. 그럼 개인정원으로 등록되었느냐고 묻자 카페를 열어야 등록이 되고 지원이 된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와서 둘러보는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인가 싶다. 해남 땅 끝 마을에 들르면 내 집처럼 포근한 '엄마의 정원'이 바다를 연하여 피어있다. 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느라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는 조붓한 길이 아쉽다. 휠체어가 다니기는 어렵겠다. 주로 정원들이 산과 들을 맞대어 펼쳐지는데 이곳은 바다를 연하여 펼쳐진다. 해넘이가 아주 멋지다는데 그 시간에 머물지는 못할 것 같다.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를 보러 가는 길.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맞은편 정원을 거닐게 된다. 그곳에 연해 머물고 싶지만 엄마에게로 향한다. 그동안 엄마의 머리카락이 길어나고 더 희어졌다. 니 돈만 죽인다고 자주 오지 말라고 하신다. 이달에는 어버이날이 있어서 오고, 다음 달에는 손녀딸이 서울에서 온다고 해서 와야 하고 이유를 줄줄이 붙인다. 딸 형편을 알기에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마음으로는 자식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실 것이 분명하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자주 보고 싶지 않겠는가. “식사는 잘하세요?” “밥은 억지로라도 잘 먹는다. 밥이라도 잘 먹으면 걸을 수 있을까 하고. 그런데 가망이 없는 것 같어.”하며 희망을 내려놓는다. 마음이 버텨야 몸이 견뎌낼 것인데. 무어라 선뜻 받아낼 말을 찾지 못해 마음만 부대낀다.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걸을 수 있는 것은 멀어진다. 뭐라고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해질 뿐이다. 이제는 틀린 것 같다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주억 거릴 수도, 그래도 모른다고 흰 거짓말을 보탤 수도 없어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기에 바쁘다. 삶을 붙안고 걸어보고 싶은 가망가지고 있을 때와, 그마저 어렵겠다는 마음이 들 때는 모든 것이 차이가 날 것만 같아 내 마음도 처연해진다. ‘엄마의 정원’을 엄마는 갈 수가 없다. 요양원이 있는 마을에 그렇게 많은 꽃들이 피어있는 정원이 있건만 보여드릴 수가 없다니. 꽃들이 많이 피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꽃이 그리울까 봐 말도 꺼내지 못한다.


  슬픔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이 멀어져 가는 것이다. 내가 알던 삶이 아니라 내 힘이 닿지 못하는 다른 생활을 마주해야 하는 것.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될 때이다. 몸이 내 맘을 따라주지 않을 때 와지는 두려움이다. 마음만 동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그때.


 지켜보는 나는 처음에는 당혹스러워 우울증 비슷하게 오더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체념이 따라오고 이제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지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을 내고 발을 굴러도 내 힘으로는 닿지 못하는 무엇이 나를 절망케 한다. 이제는 하나님께 맡길 뿐이다. 더 힘들지 않게 거하시다가 그분 품에 안기는 것을 바라는 기도뿐이다. 내 할 수 있는 것들을 욕심내지 않고 묵묵히 하기로 마음먹는다.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찾아뵈어 한 시간이라도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가 되어버렸다.


  달력이 한 장 뜯어질 때마다 엄마의 정원을 찾으면 꽃의 얼굴이 다를 것이다. 꽃들도 제 계절을 피어나고 사그라지니까. 몇 번의 정원 풍경이 바뀔 때까지 엄마는 그곳에 머물 수 있을지. 더 어려워지면 병원으로 모셔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야기하는 중에 도시락까지 싸는 사위를 향하여 삼식이라 했더니 그 와중에도 딸을 야단치신다. 그런 엄마를 보며 웃었다. 가끔은 말씀하시는 것이 배우의 대사 같아서 놀랜다. 그런 생각이 어디서 와지는지 모른다.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것이 덜렁대는 나와 다른 것 같아 비교가 된다. 젊어서는 느끼지 못했던 엄마의 모습들을 새로이 보아내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정원에 피었던 가장 예쁜 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큰집 아이들 가운데 나를 데려다 놓으면 너무 차이가 나게 예뻤다는 말씀은 엄마의 심리적인 작용이었을 것이다. 당신의 맏딸에 대한 자부심이었다고 보아야 하겠지. 모든 부모들 마음은 똑같을 것이다. 내 자식이 제일 예쁜. 그렇게 나는 엄마의 정원에 피어난 한 송이 꽃이다. 어쩌면 지금도 엄마의 정원에 핀 영원한 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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