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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진 Sep 30. 2023

가슴앓이

  강둑에 띠 풀이 많이 자랐다. 볼 때마다 그 풀로 실물교실을 해 보고 싶었다. 가위로 베어 와서 그늘에 말려 새끼를 꼬아 작은 바구니를 만들었다. 까슬까슬해서 손이 아팠다. 소금물에 삶아 부드럽게 한 다음 꼬면 괜찮을 수도. 마 끈으로 이오난사 집을 만드는 식물교실이 잡혀있어서 띠 풀도 같이 해볼까 싶었다. 말을 했는데 마 끈으로만 하자고 했다. 요즘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허락이 잘 안 된다. 그래도 내년에는 직접 새끼를 꼬아서 바구니를 한번 해보자는 이야기는 주고받았다. 이렇게 한마디의 말에 새로운 경험은 만들어져 가는 지도 모른다.

  

 직접 풀을 베어와 만들어 보았기 때문에 이런 접근이 가능했다. 아마도 언젠가는 띠 풀을 한 아름 베어와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 말리는 날이 올 것만 같은. 어렸을 때 장난으로 보릿짚이나 밀대로 만들어보던 놀이를 오십여 년이 흐른 뒤 식물교실에 들여놓았다.    

 첨단의 시대인데 새끼를 꼬아보는 것이 대수냐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아는 분 아들이 지엠에 디자인어로 들어갔는데 어렸을 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까지 조사했단다. 흙집에서 자라던 아기시절 사진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소리를 들으며 신기했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는 시대지만 미래와 현대를 아우를 수 있는 정서는 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의 고사리손으로 뭔가를 해본다는 것은  미래와 이어진다. 어떻게 뻗어 나갈지 모르는 체험시간이 다.


  뼈대가 될 부드러운 철사를 알맞은 길이로 잘랐다. 끝이 뾰족하여 아이들의 손이라도 다칠까 봐 고민이 되었다. 문구점에서 칼라 솜을 사 와 일일이 글루건으로 철사 끝에 붙였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식으로 썩 잘 어울렸다. 가족 중심으로 참여하기에 난이도가 있는 것을 해 볼 수가 있다. 아빠들이 의외로 많이 참석한다. 엄마들이 아이와 아빠를 내보내고 집안 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일을 한다고. 덕분에 아이와 아빠가 좋은 유대감이 생기는 시간이 된다. 우리 집 딸들도 아빠랑 친한 것을 보면 지금 젊은 아빠들이 아이들과의 좋은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것이 애틋함이 되어 나이 들어 갈수록 더 아름다운 관계로 깊어져가고. 아빠들이 아이들의 자람의 시간에 함께 할 때에 세월이 흘러도 끝까지 서먹하지 않고 다정한 사이로 남는다.

 

 의외로 반응이 좋다. 바구니를 엮어 보았다는 이는 없었다. 놀이가 변하여 수업이 되고 사업이 된다. 사업까지 들먹여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 집 셋째가 디자인을 전공하여 사업으로 넓혔다. 가만 들여다보면 어렸을 때 나와한 놀이들이 받침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연질철사를 필요하면 잘라가서 아이들과 다시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딱 한 분만 철사를 가져갔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무엇을 가지고 가라고 해도 가져가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꼭 필요 한만큼 확실한 것만 욕심내는 지혜로운 처사인지도 모르겠다. 계속해서 너무 좋은 행사들이 치러지기 때문인가.


  주문한 이오난사 풀이 오지 않아 준비해 간 나무수국 꽃을 잘라 바구니에 넣어 보냈다. 이오난사가 도착하면 가지러 오기로 하고서. 며칠 뒤 아이들이 이오난사를 바구니에 넣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이 풀은 흙에 심기 우지  않고 공중뿌리로 공기 중에 있는 물기를 빨아들여 살아가는 식물이다. 잊어버리고 있다가 한 번씩 분무해 주면 잘 살아간다. 작아도 공기정화식물.


  아이들의 사진을 본 나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너무 예뻐서. 나는 언제나 저런 손주들을 안아볼까 싶은 간절함. 나이 들어가는 아련함이다. 큰 딸은 결혼을 안 할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아는 분이 좋은 혼처가 있는데 한번 물어보라기에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경험에 기도만 하고 있다.

 

 어느 모임에 갔더니 명절 같은 때에 며늘아기들이 시댁에 오면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고 했단다.  시부모님들이 내려올 때마다 용돈을 오십 만원씩 쥐어준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탁한 공기처럼 내 주위를 맨 돈다. 늘 여유 없이 살아가는 나에게는 벅찬 이야기이다. 산후조리원경비나, 백일이나 돌에 얼마씩 보냈다든지, 손주 보려면 얼마가 있어야 된다는 등.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손주가 태어난다 하더라도 보기나 할 수 있을까 싶어 가슴앓이처럼 명치에 뭔가 걸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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