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의 시간

by 민진

아주 오래된 독서 모임에 나갔다. 달에 한 번씩 만났는데 이제 두 달에 걸쳐 얼굴을 본다. 그마저 다 같이 마주하기 드물다. 두 사람이 빠진다기에 그럼 우리도 쉬면 어떻겠느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자주도 못 보는데 누구 빠진다고 안 만나면 모임이 어떻게 되느냐기에 맘을 고쳐먹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약속했던 밥집이 정기휴일이다. 다른 곳을 찾아야 했다. 청국장 집 가려느냐기에 싫다고 했다. 대신에 드라마 ‘폭군의 셰프’에 나왔던 슈니첼이 떠올랐다. 한국인 누구나 좋아한다기에 거기로 정했다. 우리가 잘 가는 ‘오후에 홍차’ 찻집이 가까이 있기도 해서다. 맨 나중에 온 이가 낮에도 돈가스를 먹었다기에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던. 탄수화물은 빠진 샐러드와 고기만 있는 식단으로 주문했다.

큰일을 치른 이가 있었다. 바로 위 언니를 보내고 왔다고. 학원에서 아이들 수업 중이라 전화를 못 받았는데 그것이 언니의 마지막 전화였다고. 시난고난하던 언니지만 병원에서 수술도 잘 되었다 길래 안심했단다.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미어지겠느냐며 걱정이 앞섰다. 육십 대 초반의 우리 또래였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 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일상은 무한대의 삶인 것만 같이 살아간다. 만약 앞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아침에 일어나 꽃에 물 주고 조금 돌본 뒤에 한 삼십 분 책을 읽는다. 요즘은 산산한 바람까지 놓인다. 내게 있어 하루 중 제일 예쁜 시간이다.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도, 억지로 무언가를 맞추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꽃들을 마주 보며 그저 즐거워하면 되는.


요사이 내가 바라보며 웃는 녀석은 분홍 능소화이다. 능소화 하면 큰 주황색 나팔 같은 꽃이거나, 미국 능소화를 떠 올릴 것이다. 내게 있어 올여름 잘한 일이 분홍 능소화를 산 것이다. 가느다랗고 연약해 보여 꽃 몇 송이 보여주다가 멈추겠거니 했다. 순 지르기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내고 야리야리한 꽃을 이어 이어 피워주고 있다. 그렇게 꽃을 앞에 두고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특혜인 충만한 나의 시간이다.


책을 가까이하려는 것은 내 생각에 갇히지 않겠다는 나름의 피난처다. 나이가 들어가니 기억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생각에 몰두하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다. 하늘의 구름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그 자리에 가만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껏 멈춰 있는, 같은 하늘을 본 적이 없다. 구름이 흘러가면서 파란 하늘도 보여주고, 신비로운 구름 그림을 그릴 때가 있어 감탄하면서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그렇게 나의 생각도 머물지 않으려면 무언가 새로운 생각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만 같다. 샘물은 퍼내어야 새로운 물이 솟아나듯이 같은 생각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꾸 갇히는 것 같이 답답해진다.

그렇다고 깊이 있는 책을 읽는 것은 또 아니다. 짧게 써진 글을 읽는다. 부담을 내려놓고 싶어서인 것 같다. 가볍지 않으면서 무겁지도 않은 것을 원한다. 어제는 한강의 <<빛과 실>>이라는 책을 읽었다. 초반에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엔 시가 몇 편 있고, 북향 정원을 가꾼 이야기가 있었다. 햇빛이 들지 않는 북향에 심어진 나무에게 햇빛을 쐬어주려고 거울로 빛을 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더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가 그늘에 사는 식물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햇빛을 나눠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감동이다. 한편으론 저 시간에 저걸 하고 있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작가도 나와 같이 그 시간이 다른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여백의 시간이었을지 모른다. 나도 꽃을 가꾸는 사람이기에 그 모습이 너무 공감이 되었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뭘 하든지 열심히 하는 건가 싶어 약간의 질투를 느끼기도 하면서.


이렇게 아침 시간은 예쁜 시간으로 물든다. 저절로 감사한 마음이 싹처럼 돋아난다. 순식간에 삼십 분이 지난다. 밥을 해야 한다. 새 반찬은 뭘 만들어야 하나 궁리하면서 일어난다. 어쩌면 우리에겐 여백 같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걸리적거리는 시간도 넉넉히 마주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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