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굴 미역국을

토닥토닥해 주고 싶다

by 민진

셋째를 낳고 처음으로 기절이란 것을 해 보았다. 간호사가 ‘산모님, 산모님 정신 차리세요.’ 하는 말이 먼 곳에서 들려오더니 의식이 돌아왔다. 의사는 수혈을 하라고 했다. 그 당시 뉴스에서는 수혈 한 사람들이 에이즈에 감염이 되기도 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겁이 났다. 의사에게 헌혈 말고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액체로 된 철분제를 먹으면 피가 빨리 생성이 된다고 해 그렇게 했다. 그때 마신 철분제의 비릿한 맛을 지금도 기억한다. 쭉 빈혈을 달고 살았다. 수치가 낮아지면 철분제를 먹었다가 괜찮아지면 멈추고. 갱년기가 되어 생리가 갔다. 자연스레 빈혈도 안녕을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헌혈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하여 열 번은 채워보자고. 지난해 상반기에 때를 놓치고 겨울에 갔는데 항생제를 먹는 중이라고 퇴짜를 맞았다. 헌혈이 하고 싶다고 무조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도 따라주고 시간도 있어야 하는. 기다리는 것까지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약물이 돌고 있는 피 말고 깨끗한 피를 원했다. 갑자기 드라큘라가 떠오른다.


헌혈은 가까운 대학교에 헌혈차가 오면 그곳으로 간다. 엊그제 헌혈이벤트 기간이라는 안내를 받았다. 일주일 정도. 날 잡아 일 마치고 갔더니 내 앞으로 열 명의 학생이 있다. 전에는 대기표를 주고 시간이 되면 오라 하더니 진행 방식이 달라졌다. 생각으로는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려 했는데. 그 대신에 학교 한 바퀴하고 오면 내 차례에 끼워달라며 산책을 나섰다.


수양매화가 가지를 늘어뜨려 꽃을 피워 물었다. 주변이 아직 무채색이니 화려하지 않은 매화가 눈길을 끈다. 동백은 겨울부터 피기 시작했는지 꽃이 붉다. 연못에 갔더니 새소리가 나무를 깨우고 있는 것 같다. 개울물 소리는 졸졸, 비단잉어들은 느릿느릿 헤엄쳐 다닌다. 학기는 시작되었고 봄도 시작되었다.


제자리로 돌아와 자리를 지켰다. 옆에 앉은 여학생이 신분증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자 안내하던 학생이 모바일 신분증은 없느냐 묻는다. 없다니까 주민등록증을 만든 날짜를 기억하느냐고 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한다는 것일까. 나는 너무 까마득하여 아무 생각이 없는데. 대학교 일 학년이면 만든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생각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속으로 헌혈을 하러 오면서 어떻게 신분증을 안 챙겨 올 수가 있지! 하며 마음으로 째려본다.


기다리는데 학생들에게 큐알코드를 찍고 전자문진을 하라고 하면서 나에겐 말이 없다. 내가 이걸 찍을까요? 하자 그때서야 큐알코드를 찍고 문진을 하라고 알려 준다. 차례가 되어 채혈을 하여 헌혈하기 적합한지 다시 점검받는다. 한 남학생은 강화도에서 군복무를 했는데 말라리아 위험지역이라고 일 년 동안 헌혈할 수 없다며 아쉬워하며 갔다. 침대에 누워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여 400ml를 내어주었다. 모두 다 그만큼을 가져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누군가와 피를 나눌 만큼 건강하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으쓱해졌다.

헌혈을 마치고 다른 곳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모르는 전화번호가 뜬다. 받아보니 헌혈한 곳의 안내하는 학생의 목소리다. 헌혈증을 놓고 갔다고 한다. 언제까지 있을 거냐고 하니 십분 후면 마친다고 하였다. 그때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하자 도서관 안내대에 맡긴다고 하였다. 그냥 버리라고 할까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오르는데 내 이름자 적힌, 어렵게 한 헌혈증이 버려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찾으러 갔다. 이번에는 신분증을 안 가지고 온 그 여학생이 나를 째려볼 차례인가. 어떻게 헌혈증과 쿠폰들을 놓고 갈 수가 있느냐고. 치킨을 오천 원 할인받을 수 있고, 씨제이에서 만원이나 쓸 수 있는데 하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작은 보탬이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하다. 나를 토닥토닥해 주고 싶다. 아직 네 번이 남았다. 남편에게 자랑스레 헌혈 후 받은 보조배터리를 선물로 주면서 다음에는 같이 가자고 하자 대답이 없다. 아무 말 없다는 것은 같이 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대답 없는 허락. ‘같이 헌혈하는 부부’ 괜찮지 않은가? 그러기 위해 식단에 조금 더 신경을 써야겠다. 맑은 피를 가지고 있어야 될 것만 같으니.

사백미리 피를 보충하기 위해 오늘은 나를 위한 굴 미역국을 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