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

누구라도 빈 배일 때가 온다

by 민진

한적한 시골길로 들어서자 집들과 담벼락 밑에 도란도란 노란 국화꽃에서 가을이 피어난다. 화포해변에 다다르니 밀물이다. 바람이 없어 파도소리가 야트막하게 철썩 거린다. 배들이 말없이 매어있고 파도가 밀려오는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 봉화산 밑에 번듯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화포의 우리말 이름은 곶개다. 꽃이 있는,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남도 문화길’이라는 표지판 말들이 너무 예뻐서 몇 번을 읽었다. 순천만 갈대 길, 꽃 산 너머 동화사길, 읍성 가는 길. 지형 이름들이 시적이어서 그것들만 읽어도 시 한 편이 마음에 담긴다. 우리 부부는 바다에 처음 나온 듯 풍경을 손 전화 카메라에 담고 담는다.


추석에도 생일에도 어머니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 아쉬워 갔다가 돌아오면서 바다에 들렀다. 어머니는 백내장 수술을 해서 땀이 눈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수시로 닦아낸다. 허리가 굽어 걷는 것이 힘들고, 손이 떨리는 것을 보면 애잔하다.


사위가 오랜만에 왔는데 반찬이 없다며 미안해하며 혹시 닭 잡을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아침에 전화를 드리고 급하게 가서 뭘 준비할 수 없었으리라. 하룻밤도 안 자고 간다고하자 딸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기느라 바쁘다. 마늘 고춧가루 참기름 등 아낌없이 싸준다. 힘이 들어서 이제는 밭농사도 할 수 없다며 줄 것이 없을까 봐 미리 걱정이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혼자 손에 자식 다섯을 키우느라 고생이란 말할 필요가 없다. 딸을 넷이나 키웠는데도 모두 객지에 있으니 어머니는 딸이 그립다. 남동생 내외가 잘하지만 딸 하나만이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한다. 막내가 남편 직장을 영암으로 옮길까 하더니만 아이들이 커가자 교육 때문에 인천에 주저앉았다. 가장 가까이 사는 내가 진주에서 두어 시간을 족히 가야 하니 자주 찾지를 못한다.


남편과 파도소리를 들으며 바닷가를 거닌다. 조가비들이 하얗게 몸을 씻고 게들은 종종걸음으로 도망친다. 한쪽에 낡아진 배 한 척 파도에 휩쓸린다. 고기잡이도 가지 못하고 물이 들면 드는 대로, 썰물이면 바닷물이 빠지는 대로 붙박이장처럼 누워서, 갈매기들의 끼룩거림과 수평선이 부르는 듯이 늘 한편을 바라보는 배는 쓸쓸하다. 어머니도 내어 줄 것은 다 줘 버리고 유모차에 의지하여 싸목싸목 걸어 다니는 움직이는 빈 배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고 내 자식들이 있다. 마을 앞 선착장에는 파란색으로 산뜻한 젊은 배들이 정박해 있다. 보기만 해도 힘이 넘쳐 보이고 휘파람이라도 부는 듯하다. 우리의 자식들이 자식의 자식이 힘 있게 살아가면 어머니의 삶도 의미가 있어질까. 나도 언젠가 나이가 들고 어머니와 같아진 세월을 마주할 것이다. 그때에 지나간 시간들을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누구라도 빈 배일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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