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소박하지만 소담한 일상
공식적인 마지막 출근일이다. 다음 주부터는 육아 휴직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내 책상의 짐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고생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너저분하던 짐들이 하나, 둘씩 빠지자, 내 책상에서 나의 존재는 지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반납할 노트북과 전화기 하나. 결국, 그 많던 것들은 쓸모없던 것이었나? 책상은 내 인생의 한 사이클이 끝났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의 쓸모도 끝난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얀 얀스 트렉의 <바니타스 정물>와 같다.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는데, 종교개혁과 성장하는 시민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었다. 정물화는 사실적인 묘사와 다양한 물건들이 그렸다. 이 그림도 마찬가지다. 고급스러운 술잔, 투구, 과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바니타스 정물>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주제로 삼은 그림이다. 술잔과 투구, 과일은 쾌락과 무력, 욕구와 대응되는데 해골을 그려 넣음으로써 허무한 삶을 보여주고 있다.
얀 얀스 트렉, <바니타스 정물>, 1648
휴직을 앞두고, 이 그림이 생각난 것은 허무함 때문이었다. 치열했던 직장생활의 순간들이 의미 없어졌다, 마치 여행지의 종착지에 이른 여행자처럼.
허탈한 마음을 숨기고 집에 들어와 다윤이를 바라봤다.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빠를 반기듯 쌩긋쌩긋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뛰었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이제, 다윤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시작할 때구나!
주변을 둘러보니, 아내, 처제, 장모님, 강이, 산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육아 여행을 함께 할 동료들이었다.
다시 무엇인가 시작할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함께 갈 여행의 동료들이 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내 삶의 여행을 지탱할 힘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윤이는 나에게 가슴을 뛰게 만든 존재다. 가치(Value)의 어원은 ‘생명력 있는’이란 뜻을 지닌 라티어 ‘Valere’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본다면, 나는 다윤이와 함께 할 육아휴직이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칼 라르손처럼, 육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며 그의 그림을 바라봤다. 자녀가 무려 8명이나 되었던 그는 스웨덴의 국민화가로 불린다. 그림 속 소재는 자식들이었을 만큼, 딸, 아들 바보였던 화가. 그가 머릿속에서 떠 오른 것은 내 새로운 여행 선배로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 부리타를 번쩍 든 그의 모습은 나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칼 라르손, <브리타가 있는 자화상>, 1895.
그렇다!
나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