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소박하지만 소담한 일상
이아생트 리고, <루이 14세>, 1701.
여행 중 형과 산책을 했다. 늦은 시간, 2시간 반가량을 걸으며 중년을 지나가는 형과 그 뒤를 따라가는 내가 대화를 나눴다. 사실, 형과 나는 그리 친하지 않다. 성향과 삶의 궤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혈연이란 공통점을 빼면 연결고리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항상 형을 볼 때마다 리고가 그린 <루이 14세>가 생각났다. 태양왕이라 불린 절대왕정의 상징처럼, 그는 우리 집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나는 그런 형이 싫었다.
여행의 묘미는 갑작스러움이란 점이다. 같이 산책을 하시던 부모님이 먼저 들어가 버리셨다. 자연스럽게 형과 나만 둘이 남았다.
“골프 해라”
언제나처럼 형은 뜬금없었고,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여행이라서 그랬을까? 평소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을 나였다. 하지만 형의 삶이 궁금해졌고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 골프 선수처럼 보였다. 예측할 수 없는 사업이란 필드를 거친 노련한 사장님으로 성장해서였을 수도 있다.
10년 전, 사업을 막 시작할 때의 형이 떠올랐다. 의욕이 넘치고, 항상 확신에 차 있었다. 1만 2천 분의 확률의 홀인원을 꿈꾸는 골퍼처럼. 만날 때마다 구체적인 목표 액수를 외치고, 외제 차 브랜드만 고집하던 그였다. 루이 14세처럼 그는 자신감이 넘쳤다.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맞이한 지금, 형은 이전보다 많이 움츠러들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회사의 수입은 절반으로 떨어졌고, 사무실도 제법 많이 정리했기 때문이다. 사장으로서는 큰 위기의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서 알았다. 형은 움츠러든 것이 아니라 잠깐의 동면을 맞이한 곰처럼 내일을 기다리고 있음을…. 10년 뒤, 자식들과 함께 필드에 나가 같이 골프를 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100억대 자산가를 목표로 하며, ‘홀인원’ 인생을 추구했던 사람의 꿈치곤 너무 소소했다. 10년이란 시간이 그의 삶의 방향성을 변화시킨 것이었다.
형의 골프 이야기를 들으면서 골프를 생각해 봤다. 마이너스가 도리어 이득인 게임. 하지만 구멍에 공이 들어가야 승리하는 게임. 그렇다! 맥시 멀 리스트의 삶이 아닌, 미니멀 리스트의 삶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진정한 한 방의 플러스는 결정적 순간에 채우는 것. 그것이 골프였고, 형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 힘든 시기를 골프의 속성에서 해답을 찾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상의 골프채를 만들어 허공을 가르는 형의 뒷모습은 독일 낭만주의 화가였던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보였다.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1818.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기 바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형의 뒷모습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막막한 안개가 가득한 산봉우리에서 먼 미래를 느긋하게 바라보는 한 남자, 내가 아는 형은 그렇게 어른이 되고 있었다. 그의 삶을 응원한다. 그리고 내 삶의 미래를 바라본다.